디스펜스<
2023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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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2장 15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신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이며,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공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꾼,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공부하세요. (디모데후서 2:15)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이것은 명령이지 제안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겠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싶으시다면 자유 시간에 성경을 공부하세요.
아니,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공부하십시오.
공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않으면 오해로 인해 성경을 엉망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이야기 할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에 세대주의 적으로 접근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들은 성경을 모순되게 만들고 성경 전체를 맞추기 위해 성경을 비틀어 야합니다. 성경 전체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잠깐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제 여동생과 남편이 방금 집을 팔았고 이제 새 집을 찾아야 하는데 아직 집을 구하지 못했지만 새 집을 구하게 되면 이 집 저 집으로 짐을 옮겨야 합니다.
이사를 할 수 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상자를 구한 다음 각 방에 가서 상자, 침실, 주방, 욕실 등에 라벨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물건을 가져다가 상자에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상자를 가져와서 각 방에서 물건을 가져다가 상자에 넣는 것입니다.
이제 어떤 방법이 더 쉬울까요?
아무 방에서나 물건을 집어 상자에 넣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새 집으로 이사를 갔을 때 상자 더미가 쌓여 있는데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고, 게으르고 올바른 방법으로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러한 것들을 다른 방에서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이며, 성경은 일종의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집과 같고 이 집에는 여러 방이 있으며 각 방에는 다른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저기 촛대가 있는데, 촛대는 부엌에 들어갈 수도 있고 화장실에 들어갈 수도 있고 침실, 거실, 식당 등 어디든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장실은 어때요? 거실에 변기를 놓을 수 있나요? 아니요, 할 수는 있지만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점은 모든 집에는 먹을 곳, 잘 곳, 씻을 곳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집에는 이 세 가지 기본 영역이 있어야 하며, 성경 전체가 모두 하나이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며 하나의 큰 방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는 방법이 아닙니다.
성경의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알았으니 이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후서 3:15)
디모데가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중에 믿음만과 믿음과 행함의 차이에 대해서도 조금 더 살펴볼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히 갖추게 하려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3:16-17)
따라서 성경에는 교리와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네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성경이라고 말하므로 우리는 바울 서신 이외의 다른 성경 부분을 보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성경은 의로움을 가르치는 데 사용될 수 있지만 교리적으로 조심해야 하며, 이 연구에서 살펴볼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대주의 가르침 안에 "세대주의"라고 불리는 운동이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의 세대주의가 정확하지만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교회 시대는 그것을 날려 버리고, 저는 여기서 세대주의에 대해 몇 분만 시간을 할애 할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 서신 만이 오늘날 기독교인을위한 것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바울이 쓴 모든 것은 기독교인을위한 것이고 다른 것은 당신을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것을 가르치고 건전한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으면. (디모데전서 6: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어디에 있나요? 사복음서입니다.
여러분은 사복음서에 동의해야 하며, 그것을 쓴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에서 바울은 네 가지 복음에 동의하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경건에 따르는 교훈에 대하여;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질문과 말의 다툼에 대해 점 찍고 시기와 분쟁과 난간과 악한 추측과 부패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비뚤어진 논쟁과 진리가 부족하여 이득을 경건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것에서 물러서십시오. (디모데전서 6:3-5)
로마서 16장 7절을 읽어 보세요. 세대주의가 통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바울까지가 한 몸이고 바울에서 휴거까지가 또 다른 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이단이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폴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친족인 안드로니쿠스와 주니아, 그리고 사도들 가운데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나의 동료 죄수들에게 문안합니다. (로마서 16:7)
따라서 바울이 나타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세대주의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적이고 경륜적인 가르침을 취하고 경륜 중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은 당신이 엉망으로 만들면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륜적인 차이점 중 일부는 두 가지를 하나로 모아 서로 맞물리게 하려고 하면 효과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올바른 구분을 몇 가지 살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를 넘겨보세요. 이제 "누가 히브리서를 썼는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저는 바울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렇게 믿지 말아야 할 이유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이 히브리인 (유대인)에게 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첫 언약에는 신성한 봉사의 의식과 세상적인 성소도 있었습니다. 성막이 만들어졌는데 첫 장막에는 촛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었으니 이를 성소라 하더라. 그리고 두 번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 일컫는 성막이 있으니 그 안에는 금향로와 금으로 사방을 덮은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궤가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가리우는 영광의 그룹이 있으니 우리가 지금 특별히 말할 수 없느니라. 이 일들이 이렇게 제정되었을 때 제사장들은 항상 첫 번째 성막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봉사를 완수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성막에는 매년 한 번 대제사장만 홀로 들어가서 자신과 백성의 잘못을 위해 피를 바쳤습니다: 이는 첫 성막이 아직 서 있는 동안에는 가장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음을 성령이 나타내신 것이라. (히브리서 9:1-8)
잠깐만 멈춰서서 그게 무슨 말인가요? 구약의 제사장 제도와 성전, 성막에 들어가서 동물 희생 제사를 드리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9절을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당시에는 예물과 제사를 드려도 양심에 합당하게 섬기는 자를 온전케 할 수 없었고, 개혁 때까지는 고기와 음료와 잠수부 씻음과 육체의 의례만 있었으니, 이는 당시의 모습이었느니라. (히브리서 9:9-10)
개혁의 시기는 언제입니까?
11절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 곧 이 건물이 아니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를 얻으셨느니라. 황소와 염소의 피와 부정한 자에게 뿌린 암송아지의 재가 육체를 정결하게 하는 데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라. 이 때문에 그는 신약의 중보자가 되셨으니 이는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첫 언약 아래 있던 죄를 속량하사 부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유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유언자의 죽음도 있어야 합니다. 유언은 사람이 죽은 후에 효력이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유언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전혀 힘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9:11-17)
신약 성경은 언제 시작되었나요? 마태복음 1장? 그것은 신약의 시작일 뿐입니다.
틀렸습니다. 그것은 유언자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을 때 신약이 시작된 것이지 그 이전이 아니며, 우리는 그것을 살펴볼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을 보세요. 사람들이 마태복음 전체를 읽으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약성경이고, 유대인에게는 신약성경이고, 기독교인에게는 신약성경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하는 곳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니요, 그렇게는 안 됩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와서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이르되 너희 모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더라. (마태복음 3:1-2)
"천국"이라는 용어는 지상의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는 왕국을 의미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살펴보겠지만 마태복음에만 등장하고 성경 어디에도 "천국"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을 넘겨보세요. 세례 요한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부터 예수께서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4:17)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천국 복음을 전했습니다.
천국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기가 하나님이 계신 영역이고, 저기가 천국이고, 천국이 바로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 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력을 당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이 무력으로 점령합니다. (마태복음 11:12)
저기가 천국인가요? 여기가 신이 있는 곳인가요? 폭력적인 자들이 강제로 점령했습니다. 신이 천국을 통제하지 못했나요?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는 머리가있는 지상의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는 왕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이 왕국의 수도는 예루살렘이며, 아마도 인류 역사상 예루살렘만큼 많이 싸웠던 도시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지금 예루살렘에 전화를 걸어 창밖으로 전화기를 내밀면 총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폭력적인 사람들이 강제로 빼앗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적 영역, 이 천국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셨고, 그는 오셔서 예루살렘에 자신을 왕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알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4절, 빨리 거기로 돌아가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태복음의 첫 두 장에서 이 사람들이 여전히 교리적으로 구약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서 그들에게 증거하라. (마태복음 8:4)
모세가 명령한 선물 ? 사제에게 자신을 보여라? 그걸 기독교 교리와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죠? 그건 구약성경이잖아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어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어느 성에도 들어가지 말라: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그리고 가면서 전파하여 이르되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10:5-7)
오늘 끝인가요? 아니,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 우리는 유대인이 아닌데 누군가 와서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이 죄입니까? 아니요.
그때 뭔가 바뀌었어. 지금 구약성경을 다루고 있잖아요. 마태복음 1장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까지는 구약 성경이므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제 일반적으로 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로마서 13장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네 번째 계명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네 번째 계명이 뭔가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 네 번째 계명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에 예배하는 것은 악하고 잘못된 것이며 짐승의 표를받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에만 예배해야한다는 것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서 13장 9절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이 나오는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을 보세요.
그러므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거든 이 말씀에 다 이루었나니 곧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느니라. (로마서 13:9)
안식일 기억하기는 어디에 있나요? 거기 없어요.
왜 안식일이 없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에스겔 20장 19절. 저는 오늘 성경을 많이 훑어볼 예정이고, 여기서 찾아볼 성구도 많을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는 내 율례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고 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들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이 되어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에스겔 20:19-20)
누구를 위한 표지판인가요? 유대인. 예, 그들은 기독교인을위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단호하게 거부 한 후 표적 은사가 사라졌습니다. 사도 행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 한 후 표적 은사가 사라졌고 바울은 더 이상 사람들을 고칠 수 없었고 디모데에게 위장과 종종 허약함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 마시라고 말했고 의사와 함께 여행했습니다. 왜 그는 자신을 치유 할 수 없었습니까? 표적 은사가 사라졌고 환난이 올 때까지 더 이상 표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때가 야곱의 고난의시기이기 때문에 여기서 앞서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언제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요한복음 20장으로 이동합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나요? 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일주일의 첫날입니다. (요한복음 20:19)
일주일의 첫 번째 날은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안식일은 일주일의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이고, 일주일의 첫 번째 날은 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었을 텐데, 성경에서 일주일의 첫 번째 날은 일요일입니다.
19절로 돌아갑니다.
같은 날 저녁,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문이 닫혀 있을 때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19)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죠. 예수님이 오셨고, 부활 이후의 이야기인데, 구약이 아니라 신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 첫날 제자들이 떡을 떼기 위해 모였을 때 바울은 내일 떠날 준비를 하며 그들에게 설교하고 자정까지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사도행전 20:7)
자정까지 설교하는 좋은 예배처럼 들리네요. 오늘은 안 할 거니까 흥분하지 마세요.
근데 그게 언제였죠?
-안식일이었어요, 안식일은 진정한 신자로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에요...
아뇨, 일주일의 첫날이었고 일요일이었어요.
이제 성도들을위한 모금에 관해서는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령 한대로 여러분도 그렇게하십시오. 한 주의 첫날에는 하나님이 그에게 형통하게 하신 것처럼 여러분 각자가 그분 곁에 누워 내가 갈 때 모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6:1-2)
모임은 언제 만들어졌나요? 주 첫날에.
그러니까 분명히 세 곳에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보낼 헌금을 모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는데, 그 세 곳이 모두 주 첫날이고, 당연히 주 첫날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날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하루를 다른 날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은 매일을 똑같이 소중히 여깁니다. 각 사람이 자기 마음에 완전히 설득되도록 하십시오. (로마서 14:5)
일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나요? 아니요, 사실 공산주의 중국에 살고 있다면 가장 멍청한 일은 매주 일요일 9시부터 12시까지 가정 교회 모임을 갖는 것입니다. 안 좋은 생각입니다. 파키스탄에서 기독교인이라면 일요일 아침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며, 잡힐 것입니다.
주님은 기독교 교회가 박해를 받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계획하셨습니다.
따라서 특정 요일을 강제로 지정하고 이 시간부터 이 시간까지 이 날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요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쉬는 날이기 때문에 예배하기에 좋은 날이며, 일요일을 예배하지 않거나 매주 다르게 만들거나 무엇이든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성경 전체를 다른 모든 부분과 일치시켜야 한다면 어떻게 이것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과 그 다음 주 첫날에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른 경륜이 있고 거기에서 무언가 바뀌 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 조심해야합니다. 공부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그냥 성경 전체가 내 것이라고 말하고, 성경을 올바르게 나누고 싶지 않아서 시간이 많이 걸리고 공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냥 엉성하게하고 싶고 그냥 통과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신념 체계가 엉망이 되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없나니 너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갈라디아서 3:28-29)
좋아요, 여기에 또 다른 움직임이 있습니다. 당신이 메시아 닉 유대인이라고 말하거나 나는 이것이다, 나는 저것이다, 당신은 그렇게해서는 안됩니다,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습니다.
넌 뭐야? 당신은 기독교인입니다. 그게 당신이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 전체에서 가르치는 교리인가요? 아니요, 우리는 앞서 예수님이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가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읽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그에게 와서 딸을 고치기를 원했고 주인이 빵을 가져다가 개에게주는 것은 맞지 않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만 여기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거기에는 구별이 있었지만 미래에는 구별이있을 것입니까?
기독교인에게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떤 인종 출신이든 상관없이 기독교인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아주 분명하게 쓰여 있는 곳이 또 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서 1장 1절을 보세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해외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 (야고보서 1:1)
12지파에게? 12지파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밖에 있나요? 없습니다.
12개 부족이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보겠습니다.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 중에서 십사만 사천 명이 인 맞은지라. (요한계시록 7:4)
그래서 열두 지파는 환난 중에 다시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야곱이 고난을 당할 때이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다루고있는시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둘을 구별하지 않고 여기에 구원받은 유대인이 있고 구원받은 이방인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며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 11:26)
하나님은 지금은 구별하지 않으시지만 환난 속에서는 구별하십니다. 다시 한 번 경륜적인 변화, 그리스도의 몸의 휴거와 함께 경륜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 구절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다른 메시지를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 장과 데살로니가 전서 4 장은 매우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몸, 거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제가 말했듯이 그것에 대해 완전히 다른 연구를했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꺼내지면이 경륜은 끝나고 새로운 경륜이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며 그 이유에 대해 잠시 후에 몇 가지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심오한 주제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많은 게으른 기독교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이 주제를 차단하고 두뇌를 닫아 버립니다.
그냥 성경을 훑어보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약속이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 나타나리니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이 슬퍼하며 인자가 능력과 큰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마태복음 24:30)
그것은 환난이 끝날 때 유대인들이 회복 될 것이고, 그들은 이미 한 국가이지만 12 지파가 회복 될 것이고, 그들은 환난에있을 것이고, 환난을 겪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적으로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요한 계시록 19 장에서 그것에 대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휴거가 일어날 때,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이며, 그것은 신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미스터리라고 말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제 15절을 보세요. 경륜의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황폐의 가증 한 것을 볼 때 거룩한 곳에 서십시오 (읽는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15)
황폐의 가증 한 가증 한 것은 적 그리스도이며 그는 거룩한 곳에 서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형제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가 그분께 함께 모이는 것으로 여러분을 간청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
그런데 우리가 그곳에 모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웠으니 너희가 영이나 말이나 우리에게서 온 편지나 어떤 것으로도 곧 마음이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2)
당시에는 휴거는 없으며 환난을 겪게 될 것이고 주님의 날을 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도 너희를 미혹하지 말라 먼저 멸망하는 일이 있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는 하나님이라 일컫는 모든 이름이나 숭배받는 것 위에 대적하여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나타내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3-4)
그리고 다음 두 구절, 5절부터 약 9절까지는 죄의 사람이 나타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금 허락하시는 분은 그가 길을 벗어날 때까지 허락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7)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막는 것은 무엇인가요? 휴거는 언제 일어날 것인가 연구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를 막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에 7 년 동안 진노를 부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당신은 그것에 대해 읽었고, 휴거가 일어나고, 하늘에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은 큰 무리가 있고, 모든 방언과 모든 종족과 모든 나라에서 그것에 대해 읽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요한 계시록 5 장과 요한 계시록 6 장에서 첫 번째 인이 열리고 적 그리스도가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적그리스도가 드러나기 전에 하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제 적 그리스도가 거룩한 곳에 서게 될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장소는 무엇일까요?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성전이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바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그들 가운데 거하리니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6:16)
하나님의 성전은 무엇인가요? 더 명확하게 설명하는 다른 구절을 살펴봅시다.
고린도후서 6장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 그 위치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축이고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고린도전서 3:9)
16절을 보세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를 멸하실 것이요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 성전이니라. (고린도전서 3:16-17)
마태복음 24장 15절과 이 구절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적 그리스도가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서게 될까요? 아니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장소는 당신 자신의 몸이고, 당신의 몸은 성령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모아서 서로 맞물리게 할 수 없고, 둘 중 하나를 거짓말하게 만들고, 둘 중 하나를 모순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두 시기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위한 교리가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8-9)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지 않고 믿음으로 걷습니다. (고린도후서 5:7)
지금 당장 신을 볼 수 있나요? 아니요, 죽지 않는 한 그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으로 말미암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로마서 10:17)
이 시점에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성경뿐이며,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제 야고보서 2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야고보서 1장 1절의 "해외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라는 구절을 기억하세요. 야고보는 누구를 가리키고 있으며, 열두 지파는 언제 나타나나요? 환난 중에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형제들아,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믿음이 그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서 2:14)
어서 오세요! 믿음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나요? 네, 이제 가능합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8-9)
여기에 모순이 있습니까? 성경이 모순되나요? 성경이 사실이 아니라고요?
아닙니다! 그것은 두 개의 다른 경륜 시대, 특별히 다른 두 기간, 다른 시스템을 가진 두 개의 다른 기간이며,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어야하며 조금 더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게으른 형제들이 그것을하고 싶어하지 않고 마태 복음에서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거기에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2장으로 돌아가서 17절을 보세요.
그렇더라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홀로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느니라 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그러면 내가 내 행함으로 네 믿음을 보리라 하리라. (야고보서 2:17-18)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선행이 있어야 하고, 회개하려면 선행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죠.
그들은 그것을 그런 식으로 연결하려고 노력할 것이지만 그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24절을 내려다보세요.
그러면 사람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24)
에베소서 2장 8~9절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는 눈으로 보지 않고 믿음으로 걷습니다. (고린도후서 5:7)
야고보는 바로 거기서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26절을 보세요.
영이 없는 육체가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26)
환난의 성도는 잠시 후에 살펴보겠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9절부터 12절까지를 보세요.
여기서 조금 부수적으로 말하자면,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로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때문에 그를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아니요, 마틴 루터는 세대주의가 아니었고 성경을 세대주의 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큰 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였고 그는 기독교인에게 맞는 믿음과 행위가없는 것을 설교하고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야고보서 2장은 어떠냐고 말했죠. 그리고 그는 머리를 굴리고있었습니다. 어떻게 화해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냥 그 책을 태워버리고 싶었어요. 그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가해야 할 일은 단지 세대주의 신자가되는 것뿐입니다.
디모데 후서 2 장 15 절을 읽고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고, 이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12 지파에게 기록되어 있으며 환난 중에 나타납니다. 환난 중에 믿음과 행함이 있습니까?
세 번째 천사가 그들을 따라 큰 소리로 말하되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그의 표를 받으면. (요한계시록 14:9)
이제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그도 진노의 잔에 섞이지 아니하고 부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의 면전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라: 그들의 고통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니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와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밤낮 쉬지 못하더라. (요한계시록 14:10-11)
이제 12절을 보세요.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여기 있도다. (요한계시록 14:12)
믿음과 행위.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렇더라도 행함이 없으면 믿음은 죽은 것이요 홀로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7)
환난에는 믿음과 행함이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하면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예수님이 당신을 구해달라고 몇 번이나기도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으면 즉시 지옥으로가는 티켓을받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고 구원받을 수 없으며 불가능합니다.
이제 다른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경이로운 구절입니다. 이 한 구절만 가지고 전체 메시지를 작성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이것 좀 보세요.
그러나 일곱째 천사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날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선포하신대로 완성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0:7)
이제 생각해 보세요. 지금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아니요, 환난이 끝날 때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이고, 그들은 숨어서 바위가 그들에게 떨어지기를 외치며 자신을 숨기려고 울고있을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 예수님이 오십니다. 정말 멋지지 않아요?
구약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벌거벗고 도망치고, 용사들이 벌거벗고 도망치고, 집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겁에 질려 집을 뛰쳐나와 숲속을 뛰어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말 대단한 일이죠. 지금은 그분을 조롱할 수 있지만, 그분은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지만, 그 시간은 곧 끝나고 더 이상 무신론자는 없을 것입니다.
이 메시지의 마지막 요점을 설명하기 전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지금 어떻게 구원받으셨나요? 믿음과 아무것도 더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 서신에서 믿음과 행함을 더한 구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환난 중에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나요? 믿음에 행함이 더해집니다.
천년 왕국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나요? 행함, 믿음 없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11:1)
요점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은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데는 믿음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바로 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을 믿으려면 믿음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년왕국에서는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이런 대화를 나눈다고 상상해 보세요.
-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세요?
- 네, 예루살렘에 계세요. 네, 믿어요. 작년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 절제술인지 뭔지를 주님께 가져다 드리러 올라가야 했어요. 예, 그분을 보았고 보좌에 앉은 그분을 보았고 절을 했어요.
어떻게 믿음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구원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지 않을 때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경륜마다 바뀌며, 그것은 이단이 아니라 성경 교리이며, 경륜이 아닌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무시하려고하기 때문에 성경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으므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꾼입니다.
에베소서 1장으로 돌아갑니다.
또 다른 경륜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이것에 대해 정말 정말 엉망이되는 변화이며, 모든 거짓 선지자들은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며, 저는 그들이 사람들을 속박하는 방법을 폭로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을 위해 여기에 대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12)
좋아요,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2000년 전에 이미 한 번 죽으셨고, 여러분은 믿음으로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13절을 보세요.
너희도 그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 안에서 너희도 또한 믿었느니라. (에베소서 1:13)
구원받으면 봉인됩니다.
여기에서도 매우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지 말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4:30)
그것은 당신이 타락하는 날까지 인봉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구원을 받아야하고 다음 번에 타락 할 때까지 인봉됩니다. 아니요, 제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인봉되고 인봉이 너무 빨리 풀려서 도장을 몇 번 찍으면 도장이 찍혀서 쓰러질 것이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당신은 인봉되었는데 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고, 의가 당신에게 전가되고, 그분의 피가 당신의 죄를 씻어 주며, 구원은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거 아세요? 그것은 환난 속에서, 부분적으로는 환난 속에서 믿음과 행함이 더해진 것이며, 환난 속에서 당신은 끝까지 견뎌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끝까지 인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구속의 날까지 인봉되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조정하나요? 세대주의자가 아닌 이상, 세대주의자가 아닌 신자라면 성경을 엉망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휴거 전인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안전을 증명하는 또 다른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를 빛 가운데서 성도들의 유업에 참여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 주셨으니. (골로새서 1:12-13)
누가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주셨나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피를 통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골로새서 1:13-14)
좋아요, 우리 구원의 저자이자 완성자는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잃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번역되었고, 하나님은 우리를 데려가셔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으로 데려 오셨고, 어둠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구원받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구원받을 때 구원을 잃을 수 없습니다. 다른 많은 것을 잃을 수 있고 건강을 잃을 수 있고 기쁨을 잃을 수 있고 돈을 잃을 수 있고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저자이자 완성자이기 때문에 구원을 잃을 수없고 인봉되었습니다. 당신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시작하셨고, 당신이 끝내지 않고 그분이 끝내실 것입니다.
신실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죽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으면 또한 그와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그를 부인하면 또한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니라. (디모데후서 2:11-12)
아니요, 우리가 그를 위해 증거하지 않고 그를 옹호하지 않으면 거부 당하고 구원을 잃게된다는 뜻입니까? 틀렸어요, 13절을 보세요.
우리가 믿지 아니하면 그는 신실하사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시느니라. (디모데후서 2:13)
고린도전서 12장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구원을 받고 보혈로 씻김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됩니다.
이제 어떻게 자신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의 몸의 일부입니다. 그는 자신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는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겪으 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를 7 년 동안 진노를 겪게 하셨을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환난 전에 떠날 것입니다. 야곱의 고난의 시간 전에.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비신앙적인 사람들은 침대를 씹고 있을 것입니다.
- 히브리서 구절은 읽지 않겠죠! 그것은 영원한 안전을 반증하기 때문입니다.
오, 맞아요!
히브리서에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모든 구절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이라면 야곱의 고난의시기 인 환난에서 구원을 잃을 수 있습니다.
앞서 마태복음 24장에서는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히브리서 3장 1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처음을 끝까지 굳건히 지키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3:14)
보이시나요?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는 히브리인.
한번 깨달음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 만일 타락하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자기 십자가에 못 박고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하는 것을 보았음이라. (히브리서 6:4-6)
환난 중에 유대인이고 짐승의 표를 받았다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저는 그것이 이식 가능한 마이크로 칩이라고 믿지만 요한 계시록 14 장에 이마에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 짐승의 표를 받고 돌아 서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려고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당신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여기에서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읽어보세요! 그것은 말한다.
한 번 깨달은 사람은 ... 그들이 타락하면 다시 회개하도록 새롭게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히브리서 6:4-6)
다시 말해, 지금 교회 시대, 우리가있는 시대에 이것을 사용하려면 한 번 죄를 지으면 그 이후에는 구원을받을 수 없다는 의미라면 그것은 우리를 의미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천국에는 기독교인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구원받은 후 죄를 짓지 않은 기독교인을 한 명도 모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여기서 또 한 가지 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얻은 후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를 위한 제사가 없고 오직 대적들을 삼킬 어떤 두려운 심판과 불같은 진노만 남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6-27)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고의로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까? 네. 그리고 여기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죠? 틀렸습니다.
왜요? 그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은 환난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이것은 교회 시대의 기독교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환난 속에서는 아무리 영적이거나 의롭다 할지라도 짐승의 표를 받으면 천국에 갈 기회가 사라집니다.
이제 성경 에베소서, 에베소서 1장 12절부터 14절, 에베소서 4장 30절에서 우리가 앞서 읽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환난 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들고 있어 땅이나 바다나 나무에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동방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니 그가 땅과 바다를 해하라는 명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를 해하지 말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7:1-3)
그리고 그 숫자는 12 "지파"에서 각각 144'000입니다. 따라서 환난 중에 인봉 된 신자들이있을 것이며, 그들은 구원을 잃을 염려가없고 영원히 안전 할 것이지만, 구원을 받고 싶은 사람은 끝까지 인내해야하며 믿음과 행함이 있어야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함께 혼합 할 수 없으며 말이되지 않으며 성경을 거짓말하게 만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 장), 슬프게도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지금오고 있으며,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 환난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속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왜 당신이 구원을 잃을 수 있는 환난을 겪게 될 것이라고 가르칠까요?
왜 그렇게 가르칠까요?
그것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궁극적 인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러분 모두에게 내가 여러분의 영혼을 통제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선을 벗어나면 지옥에 저주 할 수 있다고 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죄로 인해 그 힘을 스스로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을 끌어 들이고 속박에 묶어두기 때문입니다.
- 내 사역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내 사역에 충실하지 않으면, 당신은 아마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고, 끝까지 견디지 못할 것이고, 환난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 구원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않는 사람들을 잡아먹고, 그 구절을 사용하여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을 잡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당신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우리가 현재있는 경륜에 대한 미래의 메시지, 일반적으로 교회 시대라고 불리는"그 용어는 성경에 없지만 요점은 우리가있는이 교회,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이시기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요점은이 시대가 여기에 있으며 다른 시대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마도 우리의 경륜, 경륜의 규칙,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이 경륜에 대한 메시지를 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디모데후서 2장 15절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인용하겠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꾼,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공부하세요. (디모데후서 2:15)
... 그 명령에 불순종하면 성경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지도 않은 모순을 만들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바보로 만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하고 구원을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들이 말씀을 엉망으로 만들고 신자들을 엉망으로 만드는 방식을 하나님은 부끄러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않는 사역을 축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