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신학 세미나: 12부
2023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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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들과 교사 여러분, 다시 한 번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웹 세미나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12과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12과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신학을 제대로 다루고 있으며,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이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한 주제를 공부합니다.
오늘 이 공부를 끝으로 이 세션을 마무리하고 다음 주에는 기독론을 다루겠습니다.
다음 34과에서는 기독론, 즉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에 대해 공부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신론, 즉 성령론에 대해 공부할 것입니다.
인류학, 인간에 대해서도 공부합니다.
천사론과 악마론에 대해서도요.
그리고 물론 구원론, 즉 구원의 교리에 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카이퍼 다브니 하드셰드 루이스 페리 쉐퍼와 고전 신학자인 칼빈과 어거스틴의 교의적이고 체계적인 신학에서 윤곽을 잡고 있습니다.
물론 이 방송의 차이점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엄격하게 고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거나 수정했다면,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과 교차하고 수정합니다.
이번 주 교훈은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관한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동기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논의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의 결과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명을 받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주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한 설명에서 이 중 일부를 다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이나 정신질환자들이 두려움을 건강하지 못한 동기로 제시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들 자체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없애라고 권하는 정신과 의사와 사람들은 생명 보험에 가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작하기에는 다소 위선적입니다.
루즈벨트가 말했듯이 "우리는 두려움 그 자체 외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두려움을 없애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신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거나 스스로 위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생명 보험과 건강 보험에 가입되어 있습니다. 적십자 및 청십자 충돌 책임 화재 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사회보장제도에도 가입되어 있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당신은 그렇지 않나요?
그런 것 같군요
따라서 두려움에 대한이 모든 말도 안되는 동기는 건강에 해로운 동기이며 두 혀를 가진 위선자의 이야기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려움이 건강에 해로운 동기라면 의사와 변호사의 95%는 머리가 아픈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사실 두려움은 매우 건강한 동기입니다.
사실 교차로에서 빨간불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살아있게 해줍니다.
이제 종교적 영역으로 들어가면 모더니스트와 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 지옥에 갈까봐 죽도록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옥이 없는 척하거나 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합니다.
갑자기 사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질병을 두려워하고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더러운 죄라는 병든 생각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신자의 보물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깨끗하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요한계시록 15장 4절에서 우리는 이렇게 읽습니다.
주여, 누가 주를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만이 거룩하시니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신이 부정한 신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신은 그 자체로 일종의 부랑자입니다.
그는 당신을 해치지 않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키스하거나 손을 내밀 것입니다. 아니면 유인물을 나눠주러 올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의 신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설명에서 신학적 문제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편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무한하고 불변하는 영원한 자기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여, 그런 신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그를 경외하게 만들었습니다.
신명기 10장 12절과 10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들 중의 신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은 신들 중의 신입니다.
그러니 목성, 제우스, 아폴로, 미트라, 금성, 다이애나, 아도니스, 아스타르테, 그리고 모든 고양이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의 신은 신들 중의 신입니다.
우주 비행사와 날아다니는 접시, 그리고 에스겔 1장에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내려오는 것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신들의 신이시며 만주의 주님이십니다.
강력하고 끔찍한 위대한 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무엘이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고 마음을 다해 진실로 그분을 섬기십시오. 그가 너희를 위해 얼마나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생각하라. (사무엘상 12:24)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람을 두려움으로 이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선하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선하실 수 있다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하나님의 본성에는 조만간 드러날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폴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십시오.
그리고 같은 문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엄위하심을 보라. (로마서 11:22)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데이비드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용서가 있기에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시편 130:4)
여호수아는 주님의 사역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하신 이 놀라운 일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다가오는 심판은 죄인으로 하여금 주님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분의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으니까요. (요한계시록 14:7)
물론 이 말을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남자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오래된 공리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그를 별로 괴롭히지 않고,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게 규칙입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매우 간단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신 러시아와 중국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독일을 두려워했습니다.
미국은 오레곤 주보다 크지 않은 나라를 두려워했습니다.
상상이 되시나요?
러시아, 영국과 동맹을 맺은 48개 주가 한 개 주보다 크지 않은 국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나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있어도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순교자들이 기둥에 가서 웃고, 기둥에 입을 맞추고, 고통받는 이들과 포로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배에서는 필수입니다.
시편 5:7.
주님의 두려움에 경배하겠습니다.
서비스에서 필요합니다.
시편 2:11.
두려움으로 주님을 섬기고 떨림으로 기뻐하십시오.
우리를 죄로부터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 20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이 너희를 증명하러 오셨고, 그분의 두려움이 너희 얼굴 앞에 있게 하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죄를 짓지 않도록.
이제 구원받지 못한 장로 사제 주교 집사 추기경과 일반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 명백한 모순을 주목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증명하러 오셨고, 그분의 두려움이 여러분의 얼굴 앞에 있게 하려 하십니다.
구원받지 못한 거듭나지 못한 종교 지도자는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두려워한다고 말합니까?
성경에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고 하지 않나요?
네.
그렇다면 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셨나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디모데후서 1:7)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말하죠?
경건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기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니까요. (히브리서 12:28-29)
저장된 경우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이제 여러분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그렇다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나요?
그러나 성령이 거하시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성령이 기록하시고 보존하신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좋은 아버지를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동시에 사랑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가 가난했거나 펑크족 아이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와 좋은 어머니를 둔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제대로 된 양육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먹었든 안 먹었든 저를 믿으세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죠.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도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도다. (시편 103:13)
그의 어머니가 위로하는 자처럼 나도 너희를 위로할 것이다. (이사야 66:13)
하나님은 여러분의 부모님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11)
올바른 양육을 받지 못했다면,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조차 방해하지 마세요.
이제 올바른 양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하려면 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좋은 정부를 위해 필요합니다.
데이비드가 말했습니다.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공의롭게 다스려야 합니다. (사무엘하 23:3)
대통령이나 왕이나 총독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가증한 존재이며 그 직책을 맡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표와 정치인,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두렵기만 하다면 그를 끌어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말을 조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교회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할 것입니다.
신을 경외하는 사람은 종교 지도자가 자신에게 종교 정책을 지시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는 규칙대로 할 것입니다.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일을 엉망으로 만들게 됩니다.
공의를 집행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필요합니다.
폴이 말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십시오. (빌립보서 2:12)
구원을 얻기 위해 일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해결해야지 일하라고는 안 하셨어
그는 하나님이 일하신 것을 해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2:12-13)
이제 마지막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하고 신경증과 정신병에 걸리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이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나요?
성경이 말한대로 실제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정신병자가 될까요?
정신병원에 입소할 수 있을까요?
주님을 경외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10가지 결과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이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잠언 9:10)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문제, 더 많은 고난, 더 많은 슬픔, 더 많은 두통, 더 많은 상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단순하고 깨끗한 인내의 두려움입니다.
둘째,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성경은 시편 147:11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 자비를 소망하는 자를 기뻐하시나이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님의 불쌍히 여김이 더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도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도다. (시편 103:13)
그것은 하나님과의 수용을 가져옵니다.
사도행전 10장 35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그분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과 함께 받아들여집니다.
이 사건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이 자신의 양심을 따랐던 사건입니다.
그는 구원받지 못했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복음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양심을 따르며 양심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셨고 선교사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복음을 믿고 거듭났습니다.
주님은 더 많은 빛을 달라는 고넬료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에게 진리 안에서 더 많은 빛을 주셨습니다.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죠.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가져옵니다.
시편 103편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있느니라.
그것은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시편 112편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산상수훈을 늘 인용하는 사람들처럼, 마치 자신이 센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난 괜찮아, 너도 괜찮아, 우리 모두 괜찮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왜 항상 순수한 마음을 축복하고 온유한 자를 축복하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경외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는 읽지 않으시나요?
조금 불균형하지 않습니까?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인용하면서 시편 112편 1절의 팔복을 잊어버렸나요?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든 참아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항상 아름다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결과는 자신감을 가져다줍니다.
잠언 14:26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는 강한 자신감이 있습니다.
잠언 16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납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악이 넘쳐납니다.
여기까지가 전부입니다.
세상의 문제를 한 줄로 정리한 것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포르노 잡지를 발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정부 관리들은 일자리를 잃을까봐 걱정하지, 신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할까봐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한 나라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사람들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납니다.
누가 악에서 떠날 것인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그들은 악은 선이고 선은 악이며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하며 국가 정부가 침몰한 곳으로 바로 가려고 합니다.
알아낼 수 없나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지옥에 떨어지고 하나님을 잊은 모든 민족은 망하리라. (시편 9:17)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는 한 나라를 높이지만 죄는 모든 민족에게 수치입니다. (잠언 14:34)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도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이 깨어있어도 헛수고입니다. (시편 127:1)
이는 국가, 교회,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제가 끔찍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매우 딱딱하고 잔인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지만, 여러분은 다른 전도사들로부터 다른 시기에 온화한 개혁을 통해 직접 들었습니다.
하지만 설교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들을 두려워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앉아있는 나라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교인들을 더 두려워합니다.
이제 교회가 엉망이 될 거라는 걸 모르시나요?
무엇이 문제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설교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적어서 성경 구절마다 성경을 바꾸고, 20년 동안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바꿀 수 있을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 신도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 같나요?
이제 하나만 물어볼게요.
설교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거의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주저 없이 화를 낼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교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의로운 회중을 두려워하는 하나님? 아니요!
그들은 연간 10만 달러를 벌기 때문에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양산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대학 교육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납니다.
왜 당신의 아들들 중 일부가 구속의 사슬을 벗어 던지지 않고 끝까지 지옥으로 가지 않는지 아십니까?
아빠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까 봐 여전히 두려워하는 아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아들이 당신보다 더 센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들은 부모님이 차를 빼앗거나 면허증을 사주지 않을까 봐, 또는 아들이 바로잡지 않거나 최소한 은폐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주유비를 주지 않을까 봐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은 건강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아들이 겪을 수 있는 많은 문제를 예방할 수 있으며, 아들도 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말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구속이 풀리면 아들이 겪을 수 있는 곤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것은 현대 교육 시스템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현대의 교육자들은 행동주의 심리학이라고 부릅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하지만 결론은 이렇습니다.
훈련과 교육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철학이 있습니다.
최신 버전과 구 버전이 있습니다.
기존의 교육 시스템, 즉 철학 교육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교육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이가 제멋대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장난을 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제지해야 합니다.
이제 선생님이 인간의 타락을 믿었는지, 중생의 필요성을 믿었는지, 성경을 믿었는지는 이 논의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육에 대한 접근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지 교사가 반드시 기독교인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로마 가톨릭 신자, 유대인일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 선호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교육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인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전 시스템에서는 아이가 타고난 성품이 악으로 향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자녀는 악을 제지하고 예방해야 하며, 옳은 일을 하면 격려하고 잘못하면 벌을 줄 수 있는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합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등장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꽃을 피운 근대적 교육 시스템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이제 아이가 기본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종교적 신념이라고 믿습니다.
그 구속을 벗고 아이의 자연스러운 구부러짐을 장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을 처벌하기보다는 아이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악이 선이고 선이 악이라고 판단하더라도 그것이 아이에게 효과가 있다면 괜찮습니다.
커리큘럼에서 이를 인용문, 즉 '가치 명확화'라고 합니다.
지옥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정의의 기준을 전복하고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항상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말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고난 역량과 잠재된 잠재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질적인 영향력과 자율성 사이의 장벽을 넘어서는 의미 있는 무의미한 상징성을 가진 대화를 통해 민족적 소통의 유효성을 검증합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알겠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결과는 악에서 떠나는 것이며,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곳에는 악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진실은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악에서 떠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악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마을에서 여러분의 자녀는 안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을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마을은 살기에 안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과학적 법칙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신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동네에 머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이 있는 사람은 이사를 갑니다.
알겠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가져옵니다.
말라치가 말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서로 자주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들으셨다. (말라기 3:16)
그것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대체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들의 두려움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만군의 여호와를 거룩히 여기고 그를 너희의 두려움이 되게 하라. (이사야 8:13)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하세요.
인생에서 가족 대신 하나님을 우선시하기 시작하세요.
신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의 우선순위에 두기 시작하세요.
하나님을 우선시하세요.
제가 먼저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당신의 두려움이 되게 하십시오.
의견을 두려워하고 싶다면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두려워하세요.
소문을 두려워하고 싶다면,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서 당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두려워하세요.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고 싶다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실 일을 두려워하기 시작하세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건강한 것이며, 깨끗한 것이며, 선한 것이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일이며, 여러분이 손에 넣은 것 중 가장 긍정적인 일입니다.
마침내 기도의 응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시편 145:19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그분을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당신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면, 가장 좋은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날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27절.
여호와를 경외하면 날이 길어지지만 악인의 수명은 짧아질 것이다.
수명이 길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경외하는 11가지 또는 12가지 결과입니다.
그것은 주님께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지혜를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주님의 연민을 증가시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수용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가져옵니다.
그것은 축복과 자신감을 가져다줍니다.
악으로부터의 분리.
그리스도인 교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줍니다.
기도에 응답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수명이 연장됩니다.
이제 여러분,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요?
돈이라고 하셨죠?
기도 응답을 받고 오래 살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지혜로 축복을 받으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든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데이비드가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주님의 진리 가운데 행하며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겠습니다. (시편 86:11)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야말로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건강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에 언급된 긍정적인 사고는 거듭난 신자의 기도 생활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이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든, 삶의 어느 지점에 있든 마찬가지입니다. 성별이나 인종을 불문하고 지구상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학문인 신학에 대한 우리의 교훈을 신뢰합니다.
여러분에게 축복이었습니다.
다음 주 같은 시간에는 기독론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기독론은 자연스럽게 아들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다룹니다.
이제 다음 주에는 기독론에 대한 첫 번째 시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룬 예언서를 다룰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그럼 다음 주 같은 시간에 뵙겠습니다.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