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신학 세미나: 9부
2023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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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다시 한 번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웹 신학 세미나에서 잠시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토론을 다룹니다.
우리의 첫 번째 연구 시리즈는 아주 자연스럽게 신학의 영역에 있습니다.
제대로 말하면 신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학문인 기독론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구원론, 구원을 연구하는 학문.
죄학, 죄에 대한 학문.
인류학, 인간에 대한 학문.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관련 과목들.
물론 모든 수업은 웹의 신학 세미나에서 성경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 주 강의는 하나님의 아버지와 침묵이라는 이름을 다룹니다.
이전 파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존재에 대한 증거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분의 본성과 그분의 통일성 무한성, 소통할 수 있는 속성과 소통할 수 없는 속성에 대해 배웠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자기 계시에서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대상이 아니며, 인간이 심연이나 심연을 파헤치려는 노력의 대상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거나 천문 장비로 우주의 광활한 움푹 파인 곳을 들여다보려는 인간의 노력의 대상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시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과학적 노력을 기울여도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육체적 인간의 육체적 어리석음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결국 신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태어나기 1800년 전에 쓰여진 히브리서 저자의 정확한 원자 이론에 따르면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나타나지 않는 것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 볼 수없고 테스트 할 수없는 영적인 것들을 다룰 때. 우리는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조사의 대상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세 가지 형태로 발견됩니다.
우리가 일차적 이름이라고 부르는 것은 히브리어 "엘"과 합성된 이름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라고 불리는 테트라 그램 마톤과 화합물.
히브리어에서 여호와의 마소레틱 모음은 아도나이이기 때문에 우리 언어의 관점에서는 아무도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발음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이 이름은 발음하기에는 너무 신성한 이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는 여호와로 제대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으로 번역되며, 여러 번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며, 물론 요한 계시록 19장에 따르면 여호와의 여호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님이십니다.
기본 단어에는 "엘" 또는 "엘라" 또는 "엘로힘" 또는 "여호와" 또는 "아돈" 또는 "아도나이" 또는 "하나님" 또는 "주님"과 같은 한 단어만 있습니다.
그런 다음 전능하신 하나님과 같이 '엘'과 함께 사용되는 두 단어를 합성한 '엘 엘로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와 합성합니다.
주 하나님, 여호와, 영원한 하나님, 등등 등등.
이제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 14개를 먼저 히브리어 구약 본문과 번역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 2장 4절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인 "엘로힘"입니다.
이 단어는 합성어이며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신격을 명확하게 가리킵니다.
엘로힘은 복수형 단어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신들을 가리킬 때 신들로 번역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하늘을 땅에서 창조하지 않은 신들은 천지 아래에서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대의 UFO 작가들로부터 듣는 현대의 것들, 우리가 지상 간 피라미드 작가들로부터 얻는 현대의 침대.
하늘과 땅을 창조한 것은 복수의 신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는 하늘과 땅을 만들지 않은 신들은 땅 아래에서 멸망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한 명백한 말씀에 위배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다른 이가 없고 내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이사야 45:5)
나, 나조차도 주님입니다. 그리고 내 옆에는 구원자가 없다. (이사야 43:11)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의구심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사야 41장부터 이사야 48장까지를 공부하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엘로힘의 첫 번째는 힘 있는 자 또는 창조하는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인 "엘 일람"(창세기 14:22)을 소유하신 최고의 주님이십니다.
창세기 15장 2절에 나오는 '아도나이'는 우리의 주인이시며 통치하시는 분인 주님을 뜻합니다.
창세기 21장 33절에 나오는 '엘 홀람'은 신비한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주님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는 공급하시는 주님, "여호와 이레"(창세기 22:14)가 계십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의 "여호와 라파"는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여호와 니시" 출애굽기 17:15, 우리의 깃발이신 주님.
출애굽기 31장 13절의 "여호와 예드 카디야",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
사사기 6장 24절의 "여호와 샬롬", 우리의 평화가 되시는 주님.
"사밧의 주" 사무엘상 1:3, 만군의 여호와.
예레미야 23장 6절의 "여호와 시드케누", 우리의 의로우신 주님.
에스겔 48:35의 "여호와 샴마"는 가까운 곳에 계신 분(현존하시는 분)입니다.
시편 7편 17절에 나오는 "여호와 엘리온", 즉 축복하시는 분(우리의 축복자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로이" 시편 23:1, 우리 목자 여호와여
구약성경의 신에게 주어진 14가지 칭호입니다.
비행 접시 주위를 날아다니는 우주에서 온 14명의 신을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항상 물과 전기를 얻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UFO 거주자들과 관련하여, 성경에 천사 나 거짓 신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논쟁이나 논쟁의 여지없이 말하겠습니다.
에스겔 1장의 점유자가 미확인 비행 물체 또는 비행 접시 점유자라는 현대 ufo 작가들의 특이한 강박 관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이라면 완전히 어리석지는 않더라도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웃기는 일입니다.
에스겔 1장에서 UFO 탑승자가 한 말을 본 사람 있나요?
흥미롭지 않나요?
여기서 우리는 에스겔 1장과 에스겔 10장이 하늘을 나는 접시에 탑승한 UFO라는 주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면서 그가 한 말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1장 2절과 3절에 기록된 말씀을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될 것입니다.
우주에서 온 신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을 세운 UFO 거주자에 대해 마지막으로 들어본 적이 언제인가요?
UFO에 탑승해 탑승자들과 대화를 나눴다고 주장하는 교수 2명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좌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흥미롭지 않나요?
이 사람들은 해마다 자신의 환각에 따라 신을 모방하려고 시도하고 마침내 누군가가 하늘에서 내려와 성경에서 누군가에게 말했다면 그것은 날아다니는 접시에 담긴 견과류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방법을 해마다 계속합니다.
하늘을 나는 접시에 있던 사람들이 에스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을 하지 않는 이유.
UFO 탑승자가 누군가에게 "간음하지 말며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까요?
저는 UFO에 관한 방대한 문헌을 이해하고 있으며, 이 주제에 관한 27개 이상의 저작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UFO의 주장은 신이 우주의 에너지의 숲 분야라고 믿는 이신론자와 친척입니다.
UFO 탑승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연합국을 전복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을 한 적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UFO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최면 상태에서 우주선을 보고 탑승한 사람들이 최면을 걸고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설문을 읽었고, 여러 곳에서 우주선 조종사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UFO 탑승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를 전복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7장에서 찾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신과 날아다니는 접시에 자신을 드러내는 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14개나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나타나시는 삼위일체 여호와 하느님께 적용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이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태복음 6:9)
이방인의 신들과 구별됩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있는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한 민족의 공동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피가 없는 천사로 창조된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신약적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약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죄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곧 영접하는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2)
구약성경에서 어떤 개인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이사야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총칭하여 아들과 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의 단위로서 국가는 나의 맏아들이라고 불립니다.
출애굽기 2장 3절과 4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나 모세와 같은 이스라엘 개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욥기 1장과 욥기 2장, 욥기 38장과 창세기 6장에 나오는 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분명히 천사 같은 존재이지만 살도 피도 없고 거듭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6장 9절의 제자들의 기도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는 마태복음 6장 9절의 기도를 바로 구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 개개인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입양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로마서 8:15)
그리스도인은 개인 기도에서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지 않고 "나의 아버지"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기에 개인적인 아들 의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맏아들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을 공동의 아버지로 모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주기도문이 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주기도문이 될 수 없으며, 제 목소리를 듣는 모든 기독교인의 기도문도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은 유대인 제자들에게 돼지고기를 금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던 제자들에게 권하신 기도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과 6장을 주의 깊게 읽으셨다면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던 유대인들이 성전 제단에 예물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눈치채지 못했다면 찾아보셔야 합니다.
이 모든 작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을 가져다가 기독교에 적용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저 평범한 어리석은 일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단어는 사도행전 11장까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눈치채지 못했다면 찾아보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6절 7절 8절 9절 10절에서 손전등을 들고 있는 기독교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주기도문이 아니었습니다.
주기도문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데,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내 아버지',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 아버지는 절대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의 "우리 아버지"는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 제자의 기도문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민족의 구성원인 유대인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문은 구약의 성도들이 율법에 따라 드린 기도문입니다.
율법에 따라 유대인 성도들은 당연히 안식일을 지키며 돼지고기를 금하는 성전 예배를 드리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시적이고 국가적인 의미에서 신이 아버지를 가졌습니다.
우선 시편 68편 5절과 같이 시적인 의미에서입니다.
시편 68편 5절을 읽습니다.
고아들의 아버지이시며 과부들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십니다.
그러나 교리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 아래 있는 국가로서만 그렇습니다.
그리고 파라오에게 말하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곧 내 장자이다. (출애굽기 4:22)
따라서 개인 의식과 개인 관계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됨을 갖는 것이 옳지 않고 오히려 국가 관계로서 개인이 옳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복수를 발견합니다.
마태복음 6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이 이방인과 격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마태복음 5장과 6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면 하나님은 이방인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 모든 것을 구한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을 아신다. (마태복음 6:32)
그리스도께서는 민족의 아버지 아래서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유대인과 집단적으로 아버지가 없는 이방인들을 끊임없이 대조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개인적인 아들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더니즘은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고 아버지는 나를 해치지 않으실 것이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끝까지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이는 매우 주제넘고 잘못된 추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누구의 아버지라는 것을 잠시도 암시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종교적 위선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할 것이니라. (요한복음 8:44)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지만, 가족에 속한 사람들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7~18절을 읽으세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어찌하여 그들 가운데서 나와서 따로 있느냐. 그리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과 딸이 되리라, 전능하신 주께서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세상 제도에서 나와 주님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누구를 아들이나 딸로 영접하는 것에 대해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 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마지막 행위가 있기 전까지는 죄인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표현에 주목하세요.
성경에는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선과 악의 차이가 없는 통합된 합성된 상대적인 것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선과 악, 깨끗함과 부정함의 차이가 있습니다.
깨끗한 항목이 나열되고 더러운 항목이 나열됩니다.
죄인의 표준을 설정하고 그가 깨끗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으며 다시 태어나야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하는 끔찍한 두려운 절대자를 분명히 지적합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구분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더럽혀진 양심은 더럽혀진 상상력 속에서 더 이상 서로 다른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부정하고 부정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능하신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과 딸이 되리라. (고린도후서 6:18)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도 하나님의 독생자를 구세주로 믿지 않는 아들이나 딸을 받아들이지 않고, 죄인을 위해 죽기 위해 내려오신 하늘 높은 곳의 더럽혀지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생명을 주셨으므로 거듭남 없이는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5:12)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하나님의 가족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읽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느니라. (그러나 가족 밖에서는).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3:36)
그래서 에베소서 2장 3절에서는 이들을 이렇게 부릅니다.
본성상 분노의 자식들.
로마서 9장 22절에서
진노의 그릇은 파괴를 위해 장착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1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지옥의 자식.
성경이 얼마나 급진적인 책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책입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니라. (이사야 64:6)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3)
최상의 상태의 모든 사람은 모두 허망합니다. (시편 39:5)
이것이 바로 성경과 동양 경전의 차이점입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에서는 감히 그 진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진실은 죽은 본성과 더럽혀진 양심, 그리고 뜨거운 인두로 그을린 양심을 가진 내 친구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며 자신을 최종 권위자로 설정하고 다른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말함으로써 수년 동안 개발하고 키워온 독선적인 이기심에 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끔찍한 진실이며 사람들이 전 세계의 종교를 쇼핑하고 비교 종교를 연구하고 종교를 비교하여 가장 불쾌하지 않은 가장 훌륭한 종교를 선택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의 기독교는 항상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인간이 받은 가장 공격적인 부정적 파괴적 비평적 학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8)
말했다.
뱀들아, 독사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저주를 피할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23:33)
데이비드가 말했을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
그 목자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으며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 그는 자신의 말을합니다. 그는 거짓말 쟁이이며 그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당신은 나를 믿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44-45)
이렇게 말씀하신 신이시죠.
자선은 수많은 죄를 덮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8)
자선은 오랫동안 고통을 겪으며 친절합니다. 자선은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자선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부풀리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4)
말했다.
모든 거짓말쟁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 제 몫을 받으리라.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요한계시록 21:8)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산상수훈과 시편 23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일부 사람들이 낚시질을 하고 엉망으로 만드는 바로 그 하나님은 여러분이 보지도 않은 마태복음 23장과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았느니라. (요한일서 4:7)
신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9)
신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식을 위해 오래 기도하라. (마태복음 23:14)
여러분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하얗게 씻은 무덤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3:27)
뱀들아, 독사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저주를 피할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23:33)
저주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41)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버지는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종교 정치인들이 세상에 가르치는 하나님의 아버지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제시된 하나님과 현대 종교 자유주의자가 제시하는 하나님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없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성구를 인용하든 상관없으며, 긍정적인 성구만 인용하고 있습니다.
계시의 신이 아닌 그 누구도 저주하지 않는 긍정적인 신을 제시합니다.
시편 23편과 입에 관한 설교, 고린도전서 13장을 문맥에서 떼어내어 드러난 단편적인 하나님이 바로 그것입니다.
문맥이 없는 텍스트는 구실에 불과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공부하고 하나님의 열네 가지 이름을 나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죄인 대신 죄 없는 완전한 의인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전가된 의를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로마서 4장 8절).
에베소서 1장 4절부터 10절까지, 당신을 가족으로 입양하고 당신을 그의 자녀로 소유하고 당신을 그의 자녀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가 불쌍히 여기는 자처럼 주님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그들을 두려워하게 하십니다.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로마서 8:14-15)
이 교훈이 여러분에게 축복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같은 시간에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
다음 주에도 같은 시간에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주님의 축복과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