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신학 세미나: 11부
2023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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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들과 교사 여러분, 다시 한 번 좋은 아침입니다.
이번 주에 공부할 주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다루는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첫 번째 시리즈에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 왔는데, 이는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기독론은 아들에 대한 교훈을 다룹니다.
그리고 신론은 성령에 대한 교리적 가르침을 다룹니다.
이전 세션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의 전달할 수 없는 속성과 전달할 수 있는 속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균형 잡힌 존재로서의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에게 삼위일체에 대한 모든 언급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의 이름 목록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버지와 침묵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이제 올바른 신학에 대한 마지막 수업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연구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아들에 대한 성경의 교리적 가르침인 기독론에 대한 34회 방송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물론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세 인격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 점은 2주 전 삼위일체에 관한 공과에서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이제 오늘 공과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다룹니다.
이 주제는 지난 4,500년 동안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온 주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잘못된 종류의 두려움과 올바른 종류의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의 귀중한 메시지 중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이 약 50번 정도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주님은 창세기 15장 1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6:24에서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10 누가복음 12:32 사도행전 27:24 요한계시록 1:17.
또한, 우리는 주님께서 누군가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6:20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가져야 할 두려움과 구원받은 사람이 가져야 할 두려움이 있습니다.
위로를 받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 계속 글을 쓰는 사도가 한 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십시오. (빌립보서 2:12-13)
요한일서 1장에서 읽었지만요.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하지 못합니다. (요한일서 4:18)
요한복음의 문맥은 구원을 잃을까 걱정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절대 신경 쓰지 말아야 할 두려움이 있다면, 이단자들이 히브리서 3장 6절과 10절 또는 베드로후서나 사도행전의 문맥에서 벗어난 인용문으로 그를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하나 있다면 바로 이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고 지옥에 갈까 봐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있습니다. (요한일서 4:17)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졌고, 그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많지만 지옥에 가는 것은 그중 하나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얼마나 분명하게 드러났는지 주목하세요.
요한일서 4장 17절과 18절에 나오는 요한이 쓴 서신에서 이러한 내용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주목하세요.
심판의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그가 계신 것처럼(현재형) 우리도 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하지 못합니다.
이제 TM과 초월적 유니 테리 언과 불교도, 반 불교도, 사이비 힌두교도들은 두려움이 건강에 해로운 동기이며 부정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이 구절을 가져 왔습니다.
따라서 어떤 선에서든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서 오는 거짓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잠언 9:10)
성경은 욥기 28장 2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사무엘하 23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공의롭게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에서 모든 사랑과 두려움을 가르치는 이 구절을 왜곡하는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18절에 따르면 이들의 뛰어난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말씀의 교리적 가르침은 어떤 종류의 두려움은 매우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를 잡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구원받은 사람은 간증이나 사역을 망치거나 자신의 생명이나 유용성을 단축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십시오. (빌립보서 2:12)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덧붙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2:13)
거듭난 신자는 성령이 그 안에 계셔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구원을 더 잘 해결해야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신자의 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을 경외하는 이 위대한 교리는 신자에게 내려져야 하며, 그는 그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든 구원을 잃을까 봐 항상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반적인 표현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덩치 큰 불량배가 설교자를 때려눕히겠다며 뛰어다니는 걸 발견하면 자신이 진짜 무신론자라는 걸 보여줄 겁니다. 다른 친구들은 저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 남자를 찾으면 어떤 놈인지 아시겠죠?
남성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기 때문에 남성들 앞에서 쇼를 하려는 남자를 상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겁쟁이야.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주님을 경외하면 사람이 그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남성을 위한 쇼를 만들기 위해 항상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강인한지, 얼마나 똑똑한지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잠언 14장 26~27절에 나오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잠언 전체에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마주한 사람은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스코필드 노트에 따르면 악에 대한 증오에 대한 경건한 신뢰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놓칠 수 없는 신약성경의 말씀에 주목하세요.
히브리서 12장 28절.
이로써 우리는 경건하고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신명기 4:1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을 모아라.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듣게 하여 그들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나를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게 할 것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의 본질은 그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섬겨야 한다.
전도서에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결론을 들어봅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전도서 12:13)
이제 세상의 문제점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으시다면 제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청소년 비행, 부모의 대립 부족을 포함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의 불순종과 규율 부족. 모든 정부 기관과 유네스코의 활동.
한 문장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준비되셨나요?
인플레이션과 세금, 그리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이 세상의 문제점을 한 마디로 정의하고 싶다면요.
뭔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840년에서 1930년 사이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형벌과 진노와 징벌로 자신들을 다루시는 것에 대해 더 걱정했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은 지금입니다.
이제 주님을 알고 주님이 누구를 사랑하시는지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징계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집안을 청소하고 계십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보리와 옥수수, 밀을 재배한 다음, 우유 가격이 두 배로 뛰었는데도 세금을 두 배로 올리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말하는 그 누구도 그런 짓을 하고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사람들은 물 마시듯 술을 마시고 마약을 던지고 그 사용을 정당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들은 그냥 그렇게 하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겁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지옥에 떨어지고 하나님을 잊은 모든 민족은 망하리라. (시편 9:17)
의는 한 나라를 높이지만 죄는 모든 민족에게 수치입니다. (잠언 14:34)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상이나 다른 신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하 17장 3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을 너희는 잊지 말고 다른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가난과 질병, 교육 부족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교도들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평화 안보 번영.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무엘에게 고백한 사울의 실수는 "나는 백성을 두려워합니다"였습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의 목을 베게 한 이유는 그가 서약을 어길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잠언 29장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올무를 가져옵니다.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피터가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5:29)
우리는 지상의 재앙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위를 바라보라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히려 지옥에서 영혼과 육체를 능히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이교도 로마인이 우리나라를 점령할 수 있다고 해도 두려움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이교도 무신론자들이 우리나라를 정복하려 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현명해야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와 운동의 위험과 악을 알고 이에 대해 항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죠? 목숨 걸고 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으니 내가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3:5)
그래서 우리는 과감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조력자이시니 사람이 내게 행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히브리서 13:6)
진정한 신자는 미래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옥에 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심판의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4:17)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요한일서 4:18)
우리는 두려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대통령이 일어나서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도 안 돼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 좋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거룩함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두려워하는 것이 좋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지옥으로 파괴할 수 있는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좋습니다.
두려워할 건 두려움뿐이야 당신은 내 다리를 당기고 있습니다.
고난과 괴로움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들지만, 신자는 세상의 두려움을 주님께 맡깁니다. 시몬 베드로는 신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돌보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베드로전서 5:7)
오직 한 가지 두려움만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 하나님 자신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누군가 말했다. 당신은 이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있다고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인생에서 가장 건강한 두려움입니다.
자동차 사고를 두려워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따라서 책임보험에 가입되어 있습니다.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중 일부는 병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나요?
사실 여러분 중 일부는 나이가 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암을 두려워합니다.
백혈병을 두려워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급여를 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직장에서 해고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예, 아니오?
하지만 어떻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놓쳤습니까?
평생을 두려움에 이끌려 살면서 어떻게 두려움이 건강에 해로운 동기이고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 별들을 우주로 던지신 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군요.
은하와 성운, 성단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당신의 몸을 만드셨고, 당신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과 숨을 주셨으며, 오늘날까지 당신을 먹여 살리신 분입니다.
그리고 천 번이나 자비를 베풀어 주셨고 온갖 재난과 고난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를 두려워하지 않으세요?
하지만 암이 두렵습니다.
신명기 13장 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고 그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목소리에 순종하여 그를 섬겨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7절에서 시몬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십시오. 형제애를 사랑하십시오. 신을 두려워하라. 왕을 공경하라.
데이비드가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그를 찬양하라.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라. (시편 22:23)
사도행전 9장 31절은 은혜 아래 있는 신약의 그리스도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경외하며 걷다가 번성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사도행전 10:2).
독실한 신자이자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죠.
고린도후서 7장 1절에 따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에게 신중한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육체와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함을 완성합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고학력 종교인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주변에 종교인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정의에 따라, 그리고 실수하지 않도록 이 참고 자료를 적어 두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제시하는 정의이며, 성령께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계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은사를 받았다고 속이려고 하는 당시의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이 주님의 계명임을 인정하라. (고린도전서 14:37)
오늘 세션에서 제가 머릿속으로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서두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개인적인 해석을 하거나 어떤 교단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형제가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인용하려는 구절은 논의 중인 주제에 대해 성령께서 주신 정의입니다.
첫째.
잠언 8:13.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시편 111:10.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이사야 33:6.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잠언 14:27.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셨나요?
이제 돌아가서 마무리할게요.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세션에서 우리가 할 일은 성경이 스스로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표현인 '여호와를 경외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욥기 28:28.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입니다.
준비되셨나요?
알겠습니다.
첫째.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악과 선이 같다고 생각하거나 선이 악이거나 악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법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문제가 뭔지 아세요?
눈앞에서 신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선과 악의 차이를 모른다면 어떻게 악을 미워할 수 있을까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정의입니다.
두 번째.
시편 111: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지혜는 대학 교육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지혜는 고등학교 교육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지혜는 고전문학 서가에 꽂혀 있는 책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지혜는 물리학을 전공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배우기 시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지혜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세 번째.
잠언 15:1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작은 것이 큰 보물과 그로 인한 고난보다 낫습니다.
이사야 33:6.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그의 보물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은이나 금보다 더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은과 금으로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사람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제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은 15년 동안 고속도로 순찰대원으로 일하다가 구원을 받고 순찰대를 그만두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불과 3주 전에 그가 저에게 한 말을 기억하시죠?
그가 말했죠. 제가 고속도로 순찰대원으로 특정 경로를 담당할 때였죠.
15년 동안 제 특정 경로에서 한 번은 자살을 시도하는 5명을 만났습니다.
테이프, 일산화탄소,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했지 형제여, 무엇이 저를 감동시켰는지 아십니까?
뭐라고요?
그가 말했다. 형제여, 그 다섯 대의 차는 모두 멋진 차였어요.
연 소득이 4만 달러 미만인 사람이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제 그 불쌍한 프로플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들은 보물이 없었습니다.
잠언 15장 16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신자의 보물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작은 것이 큰 보물과 그로 인한 고난보다 낫습니다.
네 번째.
잠언 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입니다.
불쌍한 폰세 데 레온은 젊음의 샘을 찾아 남미로 갔다가 늪에서 목이 부러졌고, 황열병과 파리와 모기, 반얀트리와 편백나무 뿌리와 잇몸 그루터기를 뚫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샘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입니다.
시편 19:9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깨끗합니다.
그것은 당신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고, 성화시킵니다.
걸음걸이를 조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깨끗합니다.
다윗은 시편 19: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주님을 경외했다면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밧세바를 아내로 맞아들여 남편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파괴적인 것이 아니며,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깨끗하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시편 19:9
간단히 말해서, 정신과 의사와 정신과 의사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토론과 관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마지막으로 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를 받아 경건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길 수 있게 하소서. (히브리서 12:28)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경건한 것입니다.
경외심과 두려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경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요?
사람들이 아무리 부정주의에 대해 이야기해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아무리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사람들을 방해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성령의 설득력 있는 사역을 공격하는 것뿐입니다.
성령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성령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부정적인 확신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당신은 성령의 설득력 있는 사역을 전복시키는 데 일생을 바치는 유료 전문가를 상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자체가 가르치고 말하기 때문에 결국 그가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보물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깨끗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경건한 것이지 경건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악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혜롭지 못하며 파산하여 영원히 살지 못하며 부정하고 경건하지 못합니다.
잠언 8:13 시편 111:10 잠언 15:16 잠언 14:27 시편 19:9 및 히브리서 12:28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현명하지 않다면 잊지 마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잠언 9:10)
오늘부터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사람을 그 다음으로 두는 삶을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올무를 가져옵니다. (잠언 29:25)
영혼과 육체를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구원을 받았다면 절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심판의 날이나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님께 마음을 두신 그를 완전한 평안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26:3)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도다. (히브리서 13:8)
그리고 그분이 오실 때까지 여러분을 흠 없이 보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좋은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