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신학 세미나 : 23부.
2024년 03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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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좋은 아침입니다.
이번 주 수업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다루는 신학적 논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세션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주 동안 기독론의 주요 주제를 다룰 것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전 강의에서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서 철저히 논의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특히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예언.
이 주제들은 모두 우리가 기독론, 즉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부르는 분야에 속합니다.
이전에 말했듯이, 그리고 아마도 다시 여러 번 말해야 하겠지만, 웹 신학 세미나의 이러한 토론은 성경이 스스로 가르치고 성경 본문에 대해 논평하는 성경 진리와 성경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확신은 성경에 대한 최고의 주석은 성경 그 자체라는 마틴 루터의 확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관점을 염두에 두고 운영합니다.
웹 신학 세미나는 어떤 것을 설득하기 위한 당파적 연구가 아니라 성경이 성경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이 강의는 수백 개의 세션으로 구성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신학에 관한 12개의 세션을 방금 마쳤습니다.
여기서는 기독론에 관한 8개의 세션을 다루었습니다.
기독론을 주제로 한 세션은 아직 30개 정도 남아있습니다.
기독론을 주제로 16회.
성경에 관한 6회
인간 창조에 관한 교훈을 주제로 한 5개의 시리즈, 총 10개의 세션.
천사론과 마귀론에 관한 16개의 세션.
구원론에 관한 28개 세션.
그리고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50개 이상의 세션이 있습니다.
따라서 웹 신학 세미나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말하는 맥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누구나 성경에서 열 구절을 꺼내서 전도지에 적어서 어떤 특정한 신학적 교리 관점을 증명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교리적인 입장을 증명하기 위해 4~5절 정도의 구절이 적힌 작은 종이를 인쇄하는 것은 다양한 그룹이 매우 좋아하는 수법입니다.
이제 구원의 계획은 분명히 서너 구절로 축소 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이 나타나는 맥락에 있다면.
그러나 안타깝게도 구원받는 방법에 대한 이 기본적인 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출판되는 전도지에는 온갖 종류의 어리석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전도지는 사도행전 2장 38절을 마치 구원의 계획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인용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고려할 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며 성전을 숭배하는 유대인에 대한 오순절 메시지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유대인의 절기일에 구약의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구약의 유대인들은 모두 돼지고기를 금식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성전을 숭배하는 유대인입니다.
누군가에게 구원받는 방법을 가르치기에 얼마나 잘못된 장소일까요?
그래서 이 세션에서는
우리는 단순히 요점을 증명하기 위해 네다섯 구절만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가르침, 성경에 언급된 모든 주요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다루며, 이번 세션과 다음 세션에서 이 주제를 다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
이전 시간에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문제를 철저히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정직한 지성인이거나 반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현현하신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가르친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누군가가 진실을 말할 때마다 자신의 죄를 폭로하려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누군가가 진실을 말할 때마다 교리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 이건 조금도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싶은 대로 믿어도 됩니다.
그것이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의 축복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종교적 신념에 관해서는 (거주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상대적으로 인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얽매여 사실이 아닌 것을 믿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는 한 가지를 말하고 성경은 다른 것을 말하는 경우, 이러한 사람들은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치명적인 고통 속에서도 교회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중세 유럽을 통해 들어온 암흑 시대의 유물이며 실제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원한다면 악마의 신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유의지의 축복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고 성경이 말할 때 그것을 가르치고 가르치십시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매우 철저하게 다루었습니다.
성경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어떤 실수 나 의심도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무엇을 믿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하지 않겠습니다.
이 세션에서 우리가 이 교리들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설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
예수님은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신성과 동정녀 탄생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참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는 죄의 문제를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아야 했습니다.
한 유명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한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셨지만 그도 슬픔을 아는 사람이었고 슬픔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한 분의 중보자가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두 분이 아닌 한 분의 하나님과 한 분의 중보자가 계십니다.
성경은 축복받은 요셉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축복받은 마리아.
축복받은 세례 요한.
아는 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이다. (마태복음 3:17)
이제 모든 세대가 마리아를 복되다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이 구절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 구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한 분의 중보자, 즉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디모데전서 2:5)
결혼하지 마세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되시기 위해 우리와 같이 되셔야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서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 (히브리서 2:17)
갈라디아서 3장 13절과 갈라디아서 4장 4~5절에 따르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율법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 있는 여자를 통해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양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첫 번째 아담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두 번째 아담(그리스도)은 부활을 가져왔습니다.
고린도전서 15:21-23.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으므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부활도 왔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신의 순서대로. 첫 열매는 그리스도요, 그 후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원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몇 가지 증거를 제시할 것입니다.
자, 먼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인간의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불러야 합니다.
한 남자의 이름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에게 직접 적용되는 이름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 그리스도 예수.
"인자"라는 문구는 복음서에서 77번이나 등장합니다.
복음서에는 '인자'라는 문구가 77번이나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살과 피, 몸과 뼈를 가지고 태어나 배고프고 목마르고 먹고 살고 자고 죽는다는 의미에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스데반은 죽기 직전 사도행전 7장 56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를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이제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이스라엘 민족과의 메시아적 관계에 대한 지상의 명칭입니다.
신약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라면 바울이 바울 서신 어디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호칭은 하나님의 아들, 즉 주님입니다.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아니면 예수님.
그러나 사도 바울은 13개의 서신에서 단 한 번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서 이렇게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더 이상 그를 알지 못합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유대인 메시아의 지상 사역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성전(신자의 몸)에 내주하시는 성부 하나님 우편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람의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인간 조상을 가졌습니다.
새끼 고양이를 키우려면 고양이 보호자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려면 인간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 메리에게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7절에 보면 마리아가 맏아들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후에 낳았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 그 자매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때가 충만할 때. 하나님은 여자로 만드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그는 여자의 씨에서 나왔다고 언급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사도행전 13장 23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다윗의 씨와 혈통에서 태어났다고 누가복음은 말합니다.
이 사람의 씨에서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에 구세주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유대인 메시아로 보내진 인간의 이름입니다.
마태복음 1:1-16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의 조상을 추적합니다.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족보는 아담의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히브리서 7장 14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 주님은 모세가 제사장직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유다 지파에서 나오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레위 제사장이 되기 위해 레위 지파 출신이 아니라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유다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살과 뼈로 태어난 인간.
몸과 마음과 영혼.
그리고 와서 울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목이 마르다, 요한복음 4장.
피곤해서 배에서 잠이 들었습니다(마가복음 14장).
그리고 결국 죽어서 묻혔습니다.
그때 그는 영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가 유령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가 떠돌아 다니며 사람들을 비추고 사람들을 떠나는 일종의 영적 존재라고 말합니까?
그는 사람이었고, 성경에서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적 본성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관찰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히브리서 2장 14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자녀들이 살과 피에 참여하는 만큼, 그 자신도 마찬가지로 같은 일에 참여했습니다.
살과 피.
받으셨나요?
요한일서 4장 3절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표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영이니, 너희는 이것이 올 것이라고 들었느니라. 그리고 지금도 이미 세상에 있습니다.
신약성경 이후 악마주의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왜 그렇게 흥미로운지 아시나요?
이 구절이 많은 새로운 번역본에 개입되어 디모데전서 3장 16절의 하나님이 육체로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설교자나 교사, 교육자 등 어리석고 말도 안 되는 말에 현혹되고 속아 온 분들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정에서도 인정될 수 있는 과학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바로잡힐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요한일서 4장 3절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은 구절은 디모데전서 3장 16절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하고 심지어 신을 배신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 개발자의 법칙을 따랐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즉, 그는 성장했습니다.
이제 신이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나는 변하지 않는다. (말라기 3:6)
주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아들들은 소멸되지 않는다. (말라기 3:6)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를 경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24)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의 본질적인 체질은 바로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다른 스피릿과 구별됩니다.
신은 영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악마도 영이며 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상속자가 될 그들을 섬기기 위해 보내진 사역 영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성장하셨습니다.
신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성장했다면 그는 인간입니다.
누가복음 2장 40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이는 성장하고 정신이 강해졌습니다.
그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이 질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누가복음 2장 46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그들은 성전에서 의사들 한가운데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질문도 했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혜가 자라났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커졌습니다.
그는 순종을 배웠습니다. 히브리서 5:8에서.
그분은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받으심으로 순종을 배웠습니다.
이제 신이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말씀해 주시겠어요?
물론 신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다루는 신학 수업에서 적절한 신학을 배웁니다.
특히 소통할 수 없는 속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고 편재할 뿐만 아니라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읽습니다.
그는 순종을 배웠습니다.
이제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우리는 신약 성경 창시 이래 그리스도의 몸을 파괴한 이 두 가지 큰 이단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의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첫 번째 이단은 그리스도께서 순종을 배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피곤해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울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진리를 가르치던 평범한 사람이었고, 순교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가르치는 첫 번째 신성 모독 교리입니다.
두 번째 신성 모독은 바로 그 점입니다.
아니, 그는 육신을 입은 신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신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이십니다.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도 변태적인 신성 모독입니다.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실 겁니다.
우리는 누구에 대한 증오나 강박감 없이 이 말을 합니다.
종교적 광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저주를 내리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저런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를 혐오하게 하라".
저희는 그보다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죠.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모든 진실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는 데 전념하는 사람들이 계속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은 언급하지 마세요.
미묘하지 않나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서
그 자신이 시험을 받으신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시험을 받는 자들을 능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 야고보서에 나오는 야고보가 어떻게 유혹을 받을 수 있었는지 설명해 주세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시고 사람을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야고보서 1:13)
하나님이 시험을 받지 않으셨다면 누가복음 4장과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유혹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었다는 기독론의 궁극적인 사실을 인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이 말합니다.
"신도?"
예.
당신이 말합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책에서는 이해하실 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건의 비밀은 위대하도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나셨느니라. (디모데전서 3:16)
이제 구원받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경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슈퍼맨도 우주비행사도 휴머노이드도 데미우르지도 여우원숭이도 아니고, 어떤 미친놈이 공상 속에서 생각해낸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를 몇 바퀴 돌고 중앙으로 들어가서 나올 때 화성에 있다고 생각한 존재가 이 지구에 내려왔습니다.
아니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는 남자가 되어 이곳에 내려왔다가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물이 그를 위해, 만물이 그를 위해, 만물이 그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아들을 영광에 이르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 구원의 대장을 온전케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10)
그는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벗어난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가 인간으로서 피 흘리며 고통 받고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게 입증된 사실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여, 일어나소서.
죄책감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세요.
주님을 대신해 피 흘리는 희생이 나타납니다.
왕좌 앞에 내 보증인이 서 있습니다.
왕좌 앞에 내 보증인이 서 있습니다.
그의 손에 내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놀라운 은혜, 어찌하여 주 나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셔야 합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유를 얻었으니 그 은혜는 무한했습니다.
그는 사랑 외에는 모든 것을 비우고 아담의 무력한 종족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놀라운 은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맙소사, 저를 알아냈어요.
이제 이해하셨나요?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주 하나님이자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시작과 끝이신 분이십니다.
그는 발톱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에 서 있었고 젖은 파도가 맨발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예의 몸값으로 평가받는 것이 그를 슬프게 했습니다.
그는 울었습니다.
그는 흙먼지 날리는 길을 오르내리며 하늘의 옷을 입고 이 땅으로 걸어오셨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배신자 아나키스트처럼 취급받았습니다.
그리고 저 위에 있는 모든 별들이 동양의 한밤중 금고에서 술을 마시고 있어도.
다만 예복은 그의 영광의 예복을 꽉 쥐고 있었고, 다이아몬드 벨은 그의 영광의 예복을 꽉 쥐고 있는 곳마다 다이아몬드 보석이 박힌 벨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더러운 발을 닦을 수 있는 어부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이 땅에 나타나셨습니다.
추위가 그를 괴롭혔고 햇볕이 그를 때렸습니다.
갈증은 목을 마르게 했고 배고픔은 그를 지치게 했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달을 보세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로 바꾸겠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별을 보세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를 놓친 무화과나무가 잎과 무화과를 버리듯 그들을 버릴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바다의 폭풍우를 보세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닥치고 누워".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지구를 보세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기둥을 지탱한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이 마르다".
그는 남자였습니다.
그는 목수로 일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절에 나오는 30세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목수 아닙니까? 마리아의 아들이자 야고보와 요셉의 형제입니다.
그의 나이는 누가복음 3장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서른 살쯤 되셨을 때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너무 인간적이어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정원사로 오해를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는 목수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유혹에 빠졌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유혹은 예수님이 단순히 육신을 입고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의 형제가 유혹을 받지 않았다면 당신이 유혹을 받기 때문에 당신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남자가 아니었다면, 당신이 남자이기 때문에 당신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피가 없다면 피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을 구할 수 없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요한복음 1:29)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주님은 갈보리 나무에 다섯 개의 피 흘리는 상처를 지니고 계십니다.
그들은 효과적인 기도를 쏟아 붓고 저를 위해 간절히 간청합니다.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그들은 울부짖습니다.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그들은 울부짖습니다.
"이 대속의 죄인이 죽지 않게 하소서."
신이 여러분을 도와주길 바랍니다.
그는 가축과 가난에 시달리며 온유함과 갈릴리 해안에서 살았습니다.
악한 자의 부끄러운 죽음.
예수님, 놀라운 주님.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7:25)
그분을 부활하신 살아 계신 구세주로 믿는 것이 오늘 여러분의 기쁨과 행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