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신학 세미나 : 27부.
2024년 0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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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좋은 아침입니다.
이번 주 강의는 신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일련의 세션 중 27번째 시간입니다.
이 세션에서 지난 몇 주 동안 논의해 온 주제는 기독론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본성,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이 수업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어떤 분이셨는지에 대한 분석입니다.
우리는 종종 찬송하거나 기도합니다.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그 소망은 가장 고귀한 것이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 점에서 그분을 닮아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은 사탄적인 것이기 때문에 몇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모방자는 마귀였으며, 당연히 그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모조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의 사자로, 마귀는 포효하는 사자로 묘사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자 메시아 또는 기름 부음 받은 크리스토스로, 마귀는 기름 부음 받은 그룹으로 불리며 공중 권세의 왕자로 불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부르듯이 마귀는 모든 교만의 자식들의 왕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주님의 천사였듯이 고린도후서 11장에는 사탄이 빛의 천사로 변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에서 하나님은 빛이고 마귀는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하며, 이것을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또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은 사탄의 일입니다.
베드로전서 2:21에서 그리스도는 행동뿐만 아니라 성품에서도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8:29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의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그의 캐릭터에 맞춰져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로마서 8장 29절은 이생의 형상에 대한 언급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언급으로, 여러분이 지금 그리스도와 같은 육체를 갖게 될 때를 말합니다.
영광스러운 육체.
경전을 우화화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신화 학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매우 자주 있습니다.
그들의 엉뚱한 사적 해석 방식은 종종 로마서 8장 29절과 같은 구절을 인용하여 이 세상에서 지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빌립보서 3장과 요한일서 3장에서는 분명히 같은 종류의 참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나타나실 때 우리가 그분과 같을 것임을 압니다.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2)
빌립보서 기자는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켜 그의 영광스러운 몸을 닮게 하리요.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역사하시느니라. (빌립보서 3:21)
이제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분 안에는 불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7:18)
그는 죄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감히 말하건대 그것은 어떤 우상도 주장할 수 없는 대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설사 그런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에 대한 공과에서 이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셨고, 절대적으로 거룩하셨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죄의 본성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람이나 신에게 알려진 죄를 짓지 않았으며 항상 올바르고 순수한 것을 행했습니다.
그가 유혹을 받았지만, 조직 신학과 교리 신학의 성화 교리에서 죄의 유혹에 대한 개념은 제외됩니다.
우리는 죄가 논쟁이라고 하는 세 번째 상태까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대상, 즉 유혹이 그 사람에게 제시될 때입니다.
유혹의 대상에 대한 조명이 주어졌을 때 이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에서는 범인이 도덕적 결과를 고려한 후 원하는 행동을 취할지 여부를 놓고 논쟁을 시작합니다.
거기서 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물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23:7)
사람은 겉으로 드러내놓고 죄를 짓기 훨씬 전에 내면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실행에 옮기기 훨씬 전부터 실행 여부에 대해 토론하거나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3장 14절에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거룩한 자와 의로운 자.
구주께서는 의를 사랑하고 죄악을 미워하는 것으로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어서 마태복음 23장에서 죄악을 미워하고 죄와 위선을 고발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성전 정화가 이어집니다.
전 세계가 지금까지 보거나 들어본 것 중 가장 혹독한 혐오 문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항상 혐오 문학이나 우울한 문학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을 상대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자신의 죄가 지목되는 것을 원망할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희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 무신론적이고 타락한 타락한 인류의 표본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죄에 대한 부정적인 설교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증오심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악마입니다.
성경에서는 의를 사랑하고 죄악을 미워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증명하고 선한 것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5:21)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붙잡으십시오. (로마서 12:9)
성경은 균형 잡힌 책이며 우리가 양극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인정합니다.
물론 이러한 양극성은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람들 외에는 어떤 대상도 생각하지 않으려는 현대 급진주의자들의 전염병입니다.
앉아서 오래 대화하다 보면 모든 사람의 갑옷에 구멍이 뚫리기 마련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악을 미워하셨고 분명한 용어로 죄악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그의 부정적이고 신랄한 반사회적 반인도주의적 발언은 500미터 높이의 벽돌 벽에 붙은 물집도 벗겨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아직 그 사실을 모르신다면 성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서 우리에게 저주가 되셨다고 합니다.
로마서 4장 6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의를 전가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거룩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그의 성격은 사랑스러웠습니다.
구세주의 사랑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우선, 아버지에 대한 그의 사랑입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 즉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공언한 목적을 수행하러 왔다고 말하며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큰 피를 흘릴 때이 직업의 명백한 진정성은이 직업의 진정성을 나타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 22:42)
구세주의 사랑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먼저는 아버지께, 그다음에는 인류에게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4장 3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을 읽어 보세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대로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이의 뜻입니다.
요한복음 14장 31절에 나오는 똑같은 직업도 주목하세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4절과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따라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부요하신 분이지만 여러분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의 가난을 통하여 여러분은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의 최고의 증거는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느니라.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이야기를 읽어 보세요.
읽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6)
우리는 읽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칭찬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느니라. (로마서 5:8)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사랑하셨고 죄인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서 구원받은 죄인들을 향한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읽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 그는 끝까지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구원받지 못한 세상을 위해 그들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실 만큼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음이라.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마태복음 5장 44절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의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마가복음 10장 13~16절의 장면에서 이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가 부자가 될 수 있도록 가난해지셔서 죄인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부요하신 분이지만 여러분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의 가난을 통하여 여러분은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여러분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내려놓고 여러분의 상처 옆에 누워준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여러분의 가난과 짐을 짊어지기 위해 내려와서 여러분의 가난을 짊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여러분과 같은 육신의 유혹을 받고 내려오신 분이 계셔서 여러분의 유혹과 고통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슬픔과 짐.
그리고 이것은 그의 본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 인 표현입니다.
그의 사랑.
그리스도의 성품은 거룩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분의 사랑의 최고의 증거는 우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죽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매일의 보살핌과 생계를 통해 우리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신약 서신의 위대한 약속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공급하시리라. (빌립보서 4:19)
그리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압니다. (로마서 8:28)
이 모든 위대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갈보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가 말했듯이
오, 사람들이 주님의 선하심과 사람의 자녀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로 인해 여호와를 찬양하게 하소서! (시편 107:31)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니이다. (시편 136:26)
주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 많으셨고 영혼을 사랑하셨습니다.
구세주의 모범을 따르고 그리스도를 닮고 싶다면, 그분이 죄 가운데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가졌던 죽지 않는 사랑을 얻으세요.
그분은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선한 목자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다른 양들은 이 무리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데려와야 합니다.
그는 무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세상과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의 사역은 대부분 한 영혼 한 영혼에게 다가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한 영혼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 영혼과 몇 시간을 보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가겠다는 마음을 품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백 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려도 아흔 아홉 마리를 광야에 버리지 않겠느냐.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찾을 때까지 쫓아가겠느냐?
예수님은 항상 잃어버린 죄인을 찾는 기쁨으로 들어갔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5:5-7을 참조하세요.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발견하면 기뻐하며 어깨에 얹고 집에 돌아와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잃어버린 내 양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기뻐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사람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15장 24절에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기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이를 위해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는 길을 잃었다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닮고 싶다면 이렇게 말하세요.
"나를 예수님처럼 만들어주세요".
그렇다면 여러분도 영혼에 대한 사랑과 개인에 대한 사랑에 순응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자신을 거부한 모든 영혼에 대해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누가복음 19:41-42에서 예수님은 목이 뻣뻣한 예루살렘 주민들을 보며 울었습니다.
도시가 아니라 그 도시에 있는 영혼들, 즉 잃어버린 남녀 개개인의 영혼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죽어가는 도둑을 향하여 그를 받아들이신 것일 정도로 영혼에 대한 짐을 지고 계셨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도둑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오늘 너희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3)
이것은 영혼의 승자이자 영혼을 의식하는 사람, 기회만 있으면 영혼을 획득하려는 기회주의자의 완벽한 예입니다.
물론 이 유형의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한 명은 존 하퍼(John Harper) 노인이었습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무디 성경 연구소에 강연을 하러 온 스코틀랜드 출신의 설교자였습니다.
건너오는 길에 그는 침몰한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서양의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는 죄인들에게 성경 구절을 외치며 위아래로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구명보트에 탑승했다가 구조된 한 남성이 있었습니다.
뉴욕으로 돌아와서 그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울고 기도하고 저주하고 있었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에 빠져서 마비가 왔어요. 익사할 줄 알았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어떡하지? 맙소사, 어떡하지?"
그는 어둠 속에서 눈앞에 파도 위로 실루엣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밤이 되면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카치 사투리에서 고함을 지르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31)
그리고 그는 해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안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혼도 구원받았습니다.
존 하퍼가 북대서양의 얼음물 아래 가라앉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비로운 분이셨습니다.
성경의 가장 짧은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울었습니다. (요한복음 11:35).
마가복음 6장 34절에서 예수님은 군중을 향한 동정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절에서처럼 사람들의 육체적 필요를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에 대한 연민으로 소경을 고치셨습니다(마태복음 20:34).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막 9:22, 눅 4:41).
예수님은 불쌍한 나병 환자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막 1:40).
그는 길 잃은 양들의 목자가 되었고, 파멸에 처한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말과 행동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서 이전에는 구세주의 위대한 기도 생활을 엿볼 수 있지만, 히브리서 5장 7절만큼 강력한 구절은 없습니다.
표시된 위치.
육신으로 계실 때, 강한 울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렸던 그 시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신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누가복음 6:12 및 마가복음 1:35 참조).
그는 세례를 받기 전, 유혹을 받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제자를 선택하기 전
예수님은 입술로 아버지께 기도하며 지상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누가복음 23:46).
그는 종종 산 중턱과 같은 고독한 장소에서 혼자 기도하기를 원했습니다.
때로는 혼자 기도하셨고 때로는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마 14:13 눅 9:28 눅 22:39).
요한복음 17장 9절과 20절에서 시몬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개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에 나오는 말씀도 주목하세요.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42).
그는 기도로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죽음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하셨습니다.
그것은 논쟁에 반대되는 마음의 태도였습니다.
온유함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에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1:29).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21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지팡이를 들고 갈까요, 아니면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갈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온유함을 배워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온유의 정신으로 그런 사람을 회복하세요.
그리고 주의 종은 다투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온유해야 합니다. 가르치기에 적합하다. 인내심. 온유함으로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르치라. (디모데후서 2:24-5)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가 나는 아마를 끄지 않으심으로 온유함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는 상심에 빠진 사람들을 매우 부드럽게 대하고 백슬라이더의 꺼져가는 불씨를 부채질했습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하셨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마음이 낮았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따르면
자신을 추천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교육을 잘 받았으며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를 알고 있으니 내게로 오너라."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셨기 때문에 겸손하셨습니다(요한복음 8:50).
구세주는 자존심을 자극하는 화려한 광고로 대중을 현혹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함 덕분에 세리와 죄인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그의 말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며 말하였다. 이 사람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먹는다. (누가복음 15:1-2)
그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쓰지 말고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겸손히 대하라는 바울의 훈계에 순종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낮추었다고 합니다.
겸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광에서 일곱 걸음을 크게 내딛고 내려오신 예수님은 흰옷과 면류관을 쓴 흰 수레가 아니라 윗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고 양쪽 팔에 구멍이 뚫린 목자의 옷을 입고 이 땅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그가 왕좌에 나타나기를 바랐지만, 그는 헛간에 나타났습니다.
영광의 군주, 흙 속에서 예복을 단련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은 터무니없는 혐의에도 그를 침묵하게 만들었습니다.
욕을 들었을 때 다시는 욕하지 않은 사람. 그는 고난을 당할 때 협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겼습니다. (베드로전서 2: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은 그분으로 하여금 더러운 어부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요한복음 13:45).
Paul이 말합니다.
남자의 모습으로 발견되신 그는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8)
이제 이 점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도덕성을 지닌 구세주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스러운 남자였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영혼을 사랑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훈계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마음을 너희 안에 품으라. (빌립보서 2:5)
마귀처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번식합시다.
성령의 축복받은 열매.
사랑 기쁨 동정 온유 오래 참음 선함 친절.
그리고 우리 주님이시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함.
겉모습뿐 아니라 내면까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수한 진리이며 기도하는 것이며, 지금까지 살았거나 앞으로 살아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남녀의 가장 높은 야망이자 목표입니다.
인생에서 스스로 설정할 수 있는 더 높은 목표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후보다 더 높은 목표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당신의 도덕적 인격과 영적 인격을 그분을 본받아 형성하세요.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 자신을 내어드릴 때 우리 안에서 다시 한 번 인격의 삶을 살기를 갈망하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회원들을 의와 거룩함에 복종시키십시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한 이 연구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겸손한 표정으로 그를 흉내 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늑대는 양의 탈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의 옷과 온유한 얼굴의 또 다른 겸손함.
송곳니를 드러낸 괴물의 침을 뚝뚝 흘리는 턱은 손목뼈를 부러뜨릴 수 있지만, 우리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분이 여기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지에 대한 현대적 의미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나 그분이 여기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지에 대한 이야기에는 특별히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그는 여기 있습니다.
죽은 자를 비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가 여기 있고, 그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특히 토마스 켐피스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거룩한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사회와 단절하고 자기 자신보다 조금 더 높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성경은 골로새서 3장에서 이를 예배라고 부르며,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용할 정도로 이기적이고 자만심에 가득 차서 자화자찬을 늘어놓지 말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도다. (히브리서 13:8)
그리고 우리는 가짜에 불과한데 그분의 능력과 기적을 위조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항상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용합니다.
아무도 물 위를 걷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을 보셨나요?
혹시 눈치채신 적이 있나요?
이 사람들이 사도 적 표적과 기적이 이스라엘에게 주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이 시대를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려고하는 것을 눈치 채 셨습니까?
유대인들은 표징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22)
이 가짜들이 항상 방언과 치유에 대해 열광하지만 물 위를 걷는 것은 시도하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눈치채셨나요?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 위를 걷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구원받은 죄인이자 사도에 불과한 시몬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능력이 동일하다면, 그것을 고백하는 여러분은 물 위를 아무 문제 없이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랬고, 사도행전 2장 38절을 설교한 사람이 바로 시몬 베드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고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성경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라고 공언하고, 이스라엘을 위해 사도들에게 주어진 카리스마적 표적이 전혀 없는데도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위선적인 고백을 하는 것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호수에 내려가서 걷기 시작하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전에는 그렇지 않으셨겠지만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2장 2절과 고린도후서 11장에 언급된 거짓 사도들의 위조 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난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 신자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 (골로새서 1:27)
부활하신 구세주의 사역이 절실히 필요한 오늘날 이 세상에서 그분은 신자 안에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일하시고 신자를 통해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또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언급할 때를 가리킵니다.
이제 오늘 세션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다뤄보겠습니다.
다음 세션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다룰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 매우 중요한 주제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기독론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기적.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승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재림의 결과.
이는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확인하시고 싶으실 것이고, 메모해 두시고 싶으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메모를 하지 않으셨다면 적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참고 자료를 적어서 집에서 개인적으로 공부하거나 성경을 검색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보관하세요.
당신의 말의 입구는 빛을 주고, 단순한 사람에게 이해를 줍니다. (시편 119:130)
다음 주 같은 시간까지 주님의 축복과 좋은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