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신학 세미나 : 30부.
2024년 04월 21일
/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들과 교사 여러분, 다시 한 번 좋은 아침입니다.
웹 신학 세미나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는 오늘 수업에 여러분과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시간에는 신학의 위대한 주제, 즉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과 인격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다룹니다.
우리는 최근 이곳에서 기독론을 공부하고 있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인격, 사역에 대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 수업에서는 다른 문제들도 공부했습니다.
이전 시간에는 신격의 문제를 공부했습니다.
삼일성의 문제.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분의 탄생,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세션에서는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해 논의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기적은 오늘 토론의 주제입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이 세상의 일상적인 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 함께 공부하며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기적은 오늘 기독론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하는 주제입니다.
아주 중요한 발표가 하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 세션에서 어떤 종류의 발표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세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가능해졌습니다.
저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많은 기부를 요청하는 서명이 담긴 기도문을 보내달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희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 세션은 커뮤니티의 어떤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희는 이 방송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데 할애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 주제는 수세기 동안 사람들이 싸워온 전쟁터였습니다.
우리 세기의 "소위" 과학자들은 이 논쟁을 해결하려고 시도해왔고, 그들은 단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척함으로써 논쟁을 해결하려고 시도해왔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를 이해하거나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소위 경험적 사고, 즉 믿지 않는 회의론자의 의심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소위 과학적 마음은 편협한 편견을 의미합니다.
뒷마당에있는 모든 신성한 소, 그리스도의 기적은 거부되어야합니다.
신자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증거는 바로 거듭남 그 자체입니다.
거듭남 그 자체보다 더 기적적인 것은 없습니다.
거듭남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을 의심할 이유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거듭남의 기적은 그 자체로 기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자신의 구체적인 삶에서 기적을 가리킬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간단히 정의하자면 기적은 더 높은 법칙에 의해 더 낮은 법칙이 제쳐지는 것이며, 더 높은 법칙은 세상의 법칙을 대체하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적의 독특함이 분명해졌습니다.
그의 신성을 증명하고 그의 메시지를 인정받기 위해 행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신성을 공격하고 그의 자격을 박탈하기 위해 반박하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 11절에서 우리는 이렇게 읽습니다.
이 기적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일이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었습니다.
선지자 모세와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 일을 위해 위임하신 능력으로 기적을 행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 기록된 35~40개의 기적을 모두 행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종교재판의 예수회 신부만큼이나 객관적인 현대의 소위 경험적 과학적 사고에 의해 불신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신에게도 아무것도 아니며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인생에서 새로운 탄생의 기적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그분의 힘을 의심하기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혹을 받았을 때 마귀에게 순종하거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기적을 행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 회의론자인 헤롯 앞에 끌려갔을 때.
헤롯이 말했다.
"뭔가 보여줘".
그는 그에게서 사인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는 데 관심이 없는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정직하지 못한 회의론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직한 회의론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그 교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든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든. (요한복음 7:17)
그러나 세례 요한의 사역을 거부하고 무도회에 가서 양심을 더럽히고 설교자를 살해한 헤롯과 같은 사람을 대할 때는 양심을 죽여야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경험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적 실존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적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마태복음 8장 26~27절에서 예수님은 자연에 대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람과 바다조차도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날 바다의 바람은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바람이나 바다를 통제하는 우주비행사나 항해사, 기상학자나 기상학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허리케인이 발생하면 도망가서 기도하거나, 남아서 기도하거나, 남아서 다쳐서 죽거나, 목숨을 걸고 도망가서 저주받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같은 사람들이 물 위를 걷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적 표징이 여전히 증거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면 말입니다.
왜 수상 워킹을 하지 않나요?
그는 악마를 다스리는 힘을 가졌습니다.
마태복음 8장 28절에서 귀신은 돼지에게서 나갔고, 사람으로부터도 나갔습니다.
그들은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돼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마태복음 8:28 9:32 15:22 17:14, 마가복음 1:23에 나오는 사람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8장 13절에서 중풍병을 고치시는 권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무력한 사람, 요한복음 5:9.
시든 손, 마태복음 12:13.
연약함의 영, 누가복음 13:12.
응고되지 않는 피, 마태복음 9:22.
수종, 누가복음 14:2.
발열, 마태복음 8:15.
귀머거리와 벙어리, 마태복음 9:33.
눈먼 자에게 시력을, 요한복음 9:1.
귀머거리에게 들려주기, 마태복음 11:5.
예수님은 나병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마태복음 8:3).
그리고 그는 기도 줄, 치유 줄, 치유 천, 오르간, 텐트, 트럭, 라디오나 TV 프로그램 없이도 10가지 종류의 질병을 치유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이기는 힘을 가졌습니다.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 요한복음 11장.
그는 또한 야이로의 딸 마태복음 9장을 키웠습니다.
누가복음 7장 12~15절에 나오는 나인 과부의 아들을 키우셨어요.
그는 병원에서 빗으로 숨을 멈춘 시신으로 누워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흘 동안 묻혀 있던 시신을 묘지에서 꺼냈습니다.
최근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그의 기적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요한복음 2장).
5000명을 먹이다, 요한복음 6:1.
4000명을 먹이다, 마태복음 5:15-32.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라, 마태복음 21장.
물고기의 입에서 올바른 변화를 찾습니다(마태복음 17:27).
그리고 바다 위를 걷다, 요한복음 6:15-21.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사흘 동안 묻힌 후 로마 백부장이 지키고 점령군 총독의 반지로 봉인된 무덤에서 걸어 나옵니다.
예수님 자신의 부활은 가장 위대한 기적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
그리고 그가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적을 살펴보면 오늘날 사도적 권능이 있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요한계시록 2장 2절에서 요한이 말한 대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거칠게 말하긴 싫지만요.
하지만 결국 저는 매우 조잡한 책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들이 사도라고 말하는 자들을 시험해 보았으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말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진심입니다.
사도들과 함께 표적이 나갔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을 때마다 사도적 표적이 이스라엘에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징후가 여전히 증거로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위조나 모방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산할 수 없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제가 방금 언급한 한 가지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물고기 몇 마리와 빵으로 4000명을 먹여 살린 소위 치유자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치유 운동의 역사에서도 어떤 조건에서든 어떤 치유자가 언제든 치유한 사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공동묘지에 가서 나흘 동안 묻혀 있던 사람을 땅속에서 끌어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길
나를 믿는 자는 이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 (요한복음 14:12)
그 언급을 당시 다락방에 있던 사도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람들을 넘어서는 것으로 확장하면 됩니다.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 가장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 날의 표징은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적의 신빙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성경의 날줄이자 지붕이며 성경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기적에 대한 기록은 감각적이거나 화려하게 표현되지 않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방식으로 제공됩니다.
그리고 모든 유형의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많은 목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비공개 청중은 없었습니다.
밀실 영매술은 없었습니다.
"산속의 휴양지로 돌아와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공개적으로 이뤄진 일이니까요.
그 누구도 이를 재현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은 독특합니다.
그는 부도덕하거나 합당하지 않은 목적으로 기적을 행한 적이 없으며, 그의 동기는 옳았습니다.
헌금을 모으는 기적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동료에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내 주머니에 있는 무언가를 내어줌으로써 나를 믿는 믿음을 행사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명분으로든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 어떤 것을 바치도록 요구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부유한 젊은 통치자에게 말한 것이 유일합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마태복음 19:21)
그는 자신을 위해 헌금을 받지 않았고, 부유한 젊은 통치자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나눠줄 만큼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신이 여기서 가진 것을 포기하면 나중에 당신이 죽을 때 신이 당신에게 무언가를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게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당신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예수님의 기적은 즉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신앙에 매달리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치유는 즉각적이고 초자연적이었습니다.
아무도 기도 줄을 묶지 않았습니다.
카드가 없어도 됩니다.
아무도 오르간 연주를 들으며 "오직 믿음만 믿는다"는 감정적 열광에 빠져들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질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기적을 통해 증명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진실성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을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뛰어난 회의주의적 지성인의 모든 노력은 순수한 양 고추냉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미친 사람들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얼음 위를 걷고 있다고 생각하죠.
뒤집기 아닌가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얼음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업용 어부도 있었습니다.
이제 반전 아닌가요?
기적은 사실이며, 거듭난 모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께서 기록하신 대로 행하셨다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기꺼이 확인합니다.
물론 구원받지 못한 지옥에 갇힌 중생하지 못한 교육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성격이 너무 강해서 최면이나 자동 암시를 통해 특정 신경 장애를 치료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불만족스러운 결과입니다.
현대의 치료사들은 최면과 자동 제안을 통해 이를 수행합니다.
긍정적인 사고의 힘으로.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정신병자의 모든 심리적 속임수에 의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시죠?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동료가 보기 시작하자 그는 손을 뻗어 동료의 눈을 만집니다.
기적을 설명하려는 어리석은 제안은 화자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바다는 얕았고 예수님은 실제로 땅 위를 걸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피터가 걷기 시작했을 때 어떻게 땅 속으로 가라앉았나요?
그 청년이 생선 한 덩이를 주자 모두들 도시락을 파서 기꺼이 나눠 먹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도시락을 가져온 영화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입니다.
죽은 자들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냥 잠을 자고 있었을 뿐입니다.
나사로가 4일 동안 낮잠을 자고 있었어요.
그리고 입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소위 과학적 사고라고 불리는 현대의 물질주의는 지옥처럼 낡았습니다.
신의 힘을 인정하지 않고 물리적인 힘만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기적을 완전히 거부합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성경의 진실성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과거에 500번 이상 스스로를 증명했고, 앞으로도 1500번 이상 스스로를 증명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의심 없이 기록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주의자, 철학자, 낙관주의자, 이상주의자, 현실주의자, 실용주의자, 범신론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그렇게 좋은 기록을 남겼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성경을 쓴 사람이 아는 것과 자연주의자, 철학자, 실용주의자, 낙관주의자, 이상주의자, 실존주의자, 불가지론자, 무신론자가 아는 것을 비교할 때입니다.
동전을 던져 누가 옳은지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해 암묵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를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탄생이 기적이었음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에게 맡겨진 책이 기적의 책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컴퓨터도 그 현상을 근사화할 수 없습니다.
사실 공학적 과학이나 물리학의 위업은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이나 그의 추종자들의 업적은 없으며, 성경에 나오는 현상에 근접할 수 있는 컴퓨터나 수학자의 업적도 없습니다.
성경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500개의 세부 사항을 규정하고, 이를 8억 9천만 부를 통해 800개 언어로 보편적으로 대중에게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500가지 예언의 세부 사항 중 하나라도 틀린 것이 있으면 신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고 법정에서 증명할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말합니다.
"그렇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한 사람에 대한 48개의 글이 있었는데, 모두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지금까지의 타격 기록은 1,000타석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적의 가능성은 어떨까요?
구약성경에서 모세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사람들이 기적을 행한 것은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적과 기적을 최초로 보여준 사람은 이스라엘의 초대 국가 지도자인 모세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복음 이전 시대에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는 제2의 모세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자 구세주인 메시아는 모세에게 주어진 표적과 기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는 표식이 필요합니다.
승천 후, 아주 자연스럽게.
베드로 바울과 사도들이 기적을 행합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 사도들의 사역 아래 믿는 자에게 표적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이 행한 기적과 표적,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주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다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표적을 찾습니다.
하지만 이제 한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오늘날에도 기적이 가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적은 메신저를 인정하기 위해서만 행해집니다.
그리고 휴거가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한 국가로 다루지 않으시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 필요성이 거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데는 기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무릎을 꿇고 그분을 신뢰하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통계적 확률에 대한 수학적 확률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유효성이 검사됩니다.
기적의 표적과 이적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동안
표적은 사도들의 사역을 따랐고, 사도들 아래서 믿었던 사람들은 그러한 표적과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4장에 표적과 기적, 치유가 그리스도의 몸의 은사에 포함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일부 카리스마적인 사람들에게는 큰 걸림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류한 권위 대신에 그들의 감정적 경험.
건전한 교리를 거부한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표적은 모세(출애굽기 4장)로 시작하여 사도들(마가복음 16장)로 끝납니다.
또한 이러한 유대인의 표징은 이스라엘을 섬겼던 유대인 사도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의 사역을 믿는 사람들을 따릅니다.
따라서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서는 이를 사도적 표적과 기사,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신약 성경이 완성되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다루기 시작한 후에는 이러한 표적과 기적은 더 이상 위조된 증거가 아닙니다(고린도후서 11:1-13).
위조에 의한 경우는 예외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2장 1절부터 10절까지).
단, 위조는 예외입니다(요한계시록 16:16).
그리고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새롭게 하시고 표적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가 사도들과 함께 사라집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 지진이 일어나도 그를 구해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설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트로피무스가 병이 낫지 않은 채 밀레투스에 남겨진 이유. (디모데후서 4장).
사도행전 마지막에 디모데에게 배탈이 났을 때 약을 먹으라고 하는 이유(디모데전서 4장)도 여기에 있습니다,
화내지 말고 읽어보세요.
그리고 화를 내면.
악의에는 어린아이가 되되 지혜에는 사람이 되십시오. (고린도전서 14:20)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에 관한 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고래가 요나를 삼켰다고 믿습니다. 성경에서 요나가 고래를 삼켰다고 하면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시지만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되게 하소서. (로마서 3:4)
자, 다음 세션에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기독론).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구원의 수단이기 때문에 기독론뿐만 아니라 구원론의 주제에도 해당합니다.
다음 주에는 구원론이라는 적절한 제목 아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공부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