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신학 세미나 : 31부.
2024년 0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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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과 교사 여러분, 다시 한 번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세션에서는 기독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다룰 것입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주제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 다른 중요한 주제인 구원론을 제외하고는 조직신학이나 교리신학에서 논의할 수 없습니다.
구원론은 구원의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가장 반대하는 두 가지 교리는 성육신에 대한 성경 교리와 속죄, 즉 피의 속죄에 대한 성경 교리입니다.
이 두 교리는 죄 많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며, 구원받지 못한 타락한 인간들이 이보다 더 강하게 저항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육신을 다루는 두 가지 위대한 교리보다 더 큰 교리는 없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을 돕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다른 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대속의 피의 속죄 교리입니다.
대속은 베드로 사도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빌립의 위대한 교리입니다.
드와이트 L.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속 외에는 인간에게 한 줄기 희망도 없다."
지금 저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 대속의 교리를 믿지 않아요."
하지만 사실 당신은 믿습니다.
제 말은, 문제의 진실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대속의 교리를 믿지 않는 척할지 모르지만, 제가 말하는 여러분 중 일부는 스스로 무덤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찍 무덤을 파는 거죠.
조금이라도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속을 이해해야 합니다.
죽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신 최고의 사역이었으며, 그분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살고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었습니다.
죄는 사형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로마서 6:23)
죄인이 짊어지든 대리인이 짊어지든 누군가는 그것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내 친구여, 당신은 당신의 죄로 죽거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죄를 짊어지고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신이 정한 시간.
또는 나를 대신하여 형벌을 치른 대속자가 나를 대신하여 죽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를 짊어지게 될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천국의 법정에서는 뇌물죄가 성립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판사를 매수하거나 시간을 지연시키거나 소송을 제기하거나 하루를 지키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피의 속죄는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한 위대한 설교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후임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학교를 십자가에 채찍질하라. 붉은 피의 선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관통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신이 예언한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그의 죽음은 신이 정해준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사야 53장 8절에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내용입니다.
그는 산 자의 땅에서 단절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62 주 후에 메시아는 끊어질 것이지만 자신을 위해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니엘 9:26)
스가랴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질 것이다. (스가랴 13:7)
이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죽음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 몇 년, 몇 년 전부터 마지막 세부 사항까지 예언된 죽음입니다.
시편 22편에서 우리는 그가 손과 발을 찔렸다는 내용을 읽었습니다.
시편 22편에서 우리는 그의 의복을 위해 제비뽑기를 할 것이라고 읽었습니다.
시편 22편 1절에서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으실 내용을 읽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53장에서 우리는 그가 채찍에 맞을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의 죽음은 신이 정하신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습니다. (이사야 53:6)
이사야 53장 10절 말씀입니다.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이 여호와께서 기뻐하셨다. 그의 영혼을 죄의 제물로 드릴 때.
사이먼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단호한 권고와 예지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도다. (사도행전 2:23)
이 죽음을 속죄라고 합니다.
'속죄'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77번 사용되었으며, 죄를 덮는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속죄는 속죄일 뿐만 아니라 속죄라고도 불립니다.
여기에는 주님께서 제물을 받으시고 만족해하신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무고한 사람은 죄인의 처벌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말씀하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죽음을 구속이라고도 합니다.
죄인은 속박되어 있으며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사이먼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은이나 금과 같이 썩어질 것으로 구속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18-19)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죄로만 이야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동.
대용품입니다.
그리고 구속이 아니라 화해입니다.
신과 인간은 적이었습니다.
이제 친구를 맺을 수 있습니다.
Paul이 말합니다.
우리가 원수였을 때, 우리는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했습니다. (로마서 5:10)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물로서도 언급됩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자,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성경이 죽음에 대해 말하는 모든 곳에서 죽음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는 물세례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물세례는 마가복음 16장에서 단 한 번만 '구원'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으며, '구원'이라는 단어는 속임수에서 구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딤전 1장).
여러분의 사역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디모데전서), 익사하는 것을 막고(사도행전 27장) 구원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장"이라는 단어를 과하게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제가 여러분에게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지옥에서 구원받았다는 뜻이라는 것을 이해하실 겁니다.
그러나 물세례는 속죄 속죄 대속 구속 중생 영생 화해 또는 대속과 결코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과 유대인 개종자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한 오순절 메시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고급 계시를 받은 후 평생 다시는 그 내용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 메시지는 바울이 구원받기 전 사도행전 2장에서도 완벽하게 괜찮았습니다.
신약성경이 있기 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계시되기 전입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글을 쓰기 전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할례를 받고 돼지고기를 금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성전을 숭배하는 유대인에게 적절한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죄인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의 속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언급을 단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발견하지만 그분의 속죄 대속 대속 화해, 대속 또는 구속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서는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기둥을 들어올린 채로 있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민수기 21:8 및 요한복음 3:14).
불명예스러운 죽음, 수치스러운 죽음입니다.
비참한 죽음.
히브리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수치를 멸시하며 십자가를 견뎌내셨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예의상 옷을 입은 채로 그림을 그리긴 하지만, 예의를 지키기 위해 옷을 입은 채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사실에 따르면 알몸을 가리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따르면 그것은 저주받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시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니 나무에 달린 모든 것은 저주를 받으리라.
또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기둥에 못 박혔다는 고대 러더퍼드와 러셀라이트의 가르침에 잠시도 속아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
가끔씩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들을 십자가에 세웠습니다.
이제 앗수르가 그들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리스도는 아시리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성경을 바로잡으세요.
그의 죽음은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원하여 죽으셨고, 그분은 강제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내 목숨을 빼앗지 못하지만 나는 스스로 목숨을 내려놓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죄 없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왜 죽으셨을까요?
그는 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그분의 죽음을 죄인들이 자신을 대적하는 모순이라고 합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죄의 결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여기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는 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대금을 전액 지불합니다.
구원을 가능하게 하려면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자의 의인일 뿐만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경건하게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현대인이 생각하지 않는 거룩하고 의롭고 공의로운 신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 반역하는 죄 많은 자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게 문제입니다.
자유주의자나 모더니스트가 이를 피하는 방법은 아무 문제가 없는 척하는 것입니다.
신은 그저 선하고 꿀과 설탕과 사탕인 척하며 용서할 기회만 주면 누구든 용서하는 척합니다.
완전히 헛소리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교리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교리입니다.
이제 막 구원을 받고 목자가 되어 양떼를 이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반쯤 구워진 양들의 현대판 슬립송과 라디오, 텔레비전을 제외하고는 그런 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피의 속죄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해 많은 반대가 있습니다.
독선적인 바보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 값을 치를 수 없습니까?"
예, 하지만 완전한 처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므로 영원은 완전한 빚을 갚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선적인 성례주의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속죄할 수 없습니까?"
지옥에서 불타 죽는다면 그럴 수도 있죠. 그 대가를 치르는 거죠.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의 모든 것이 법에 의해 피로써 정화됩니다. 그리고 피를 흘리지 않고는 사함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9:22)
오직 죽음만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영혼은 지옥에서 죽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누군가는 지옥을 "영원히 죽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영원한 존재에게 죄를 지으면 영원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시나요?
한 남자가 말했습니다.
"간음, 속임수, 과장, 과식, 조급함, 거짓말 같은 몇 가지 작은 죄 때문에 신이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 않으셨을까요?"
그건 누구에게 죄를 지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큰 반역죄를 저지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은 우주의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절도죄, 가장 귀중한 소유물인 '생명'을 훔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살라고 주신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훔쳐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나타난 하나님이라면, 여러분의 죄가 그를 죽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을 살인자라고 불렀습니다.
스데반은 산헤드린을 살인자라고 불렀습니다.
반역죄와 절도죄, 살인죄만으로는 사람을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서는 안 됩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친구.
신은 얼마나 오래 살까요?
다시 한 번, 느낌으로.
총의 방아쇠로 2초 안에 사람을 죽일 수 없나요?
법에 걸리면 2초 동안 얼마를 지불하시겠습니까?
몇 년?
욥의 말을 들어보세요.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누가 그를 의롭게 할 수 있을까요?
영원히 사는 존재에게 죄를 지으면 그 대가는 영원할 것입니다.
이제 직접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현대의 처리 방식이거나 신이 당신을 위해 한 일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종교는 두 가지뿐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천국에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성찬.
종교.
교회.
황금률.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 위에 안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죽으셨고, 바울은 이 교리를 전혀 창안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21절에서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제외하고는 홀로 남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요한복음 12:24)
이제이 대속의 교리는 사람들이 절망감을 느끼고 더 많은 죄를 짓게 만들까요?
아니요.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증오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죄 없는 구세주가 자신을 대신해 죽으시고 피 대속의 속죄를 이루셨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세주를 섬기며 죄를 짓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항상 걱정하는 사람들.
"한 번 저장하면 항상 저장".
항상 잃어버릴까 봐 걱정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죄를 짓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많은 자유를 가질수록 그리스도가 대가를 치르지 않은 곳에 고정된 것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 일부를 직접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잃을까봐 걱정하고 영원한 안전의 교리에 대해 화를 내는 것입니다.
항상 말하세요.
"내가 그렇게 믿으면 악마처럼 살 수 있는 알리바이가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들어보세요.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영원한 보안이 없는 사람이 영원한 보안에 대해 논쟁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없습니다.
남자가 돌아다니며 이런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습니다.
"한 번 구하면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을 믿는다면. 그냥 계속 악마처럼 살 수 있겠죠."
이 세상은 영원한 안전의 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하며 천국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뭐, 어쨌든.
어디에서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모르고 천국에 간다는 것을 안다면 왜 그것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 각자는 죄수를 위해 자원하여 그 대신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대체에 대해 이해하셨나요?
우리 각자는 점령군에 대한 방해 행위로 인해 한 도시에서 10명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총격대를 구성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누구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누구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원해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칭찬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느니라. (로마서 5:8)
이것은 누군가의 친척인 누군가가 대신 죽는 경우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용감한 행동으로 누군가를 위해 자원하여 죽거나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경우가 아닙니다.
평생 한 번도 악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흠 없는 순수한 죄 없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그는 독선적이고 교만한 섹스에 미쳐 돈에 미친 죄인을 대신해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는 그를 대신하여 죽고 그의 죄를 짊어질 만큼 그를 사랑합니다.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하는 친구가 있나요?
로마서 6장 2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신이 그냥 용서해주고 죽지 않게 해줄 거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근거로?
뭘 근거로요, 당신의 선량함?
회개한다고 해서 죄에 대한 처벌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저질러졌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교훈에 따라 처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명예가 위태로워지고 있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으리라. (이사야 42:8)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에 대한 사형을 요구합니다.
죄를 벌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여러분은 구름의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즈니랜드로 신학적인 여행을 떠나는 거죠.
그리고 여러분이 깨어나면 끔찍하고 끔찍한 비극이 펼쳐질 것입니다.
저 위에 신이 있다면 그는 죄가 없습니다.
저 위에 신이 있다면 그는 거룩한 존재입니다.
저 위에 신이 있다면 그는 죄를 다룰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짓겠다고 하면 그 죄를 처리할 것입니다.
그 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죄가 당신을 찾아낼 것입니다. (민수기 32:23)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받지 않으십니다. (갈라디아서 6:7)
이를 싫어하는 분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신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교양 있고 교육받은 부유한 군중과 5분을 낭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는 아침 반나절 동안 타락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악마에 씌인 센터와 눈먼 바르티매오를 처리하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죄를 벌하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군중과 이렇게 말하는 군중이 있었습니다.
"진실이란 무엇인가요?"
그런 다음 돌아서서 걸어 나갔습니다.
그는 그들과 5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뉴스 미디어와 펄프 잡지에 세뇌되어 신이 죄인을 지옥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의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지옥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거나 개조 또는 리모델링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자가 지옥에 에어컨을 틀었던 이유는 지옥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도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대가로 자신의 의를 지불한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혹한 형벌을 내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게 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로마서 3장.
자신의 의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를 하나님의 의에 맞추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시죠?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럴 용기가 없으시겠죠.
무슨 말씀이신지 아시죠?
말씀하실 용기가 없으시니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책에서 그리스도가 당신의 의라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시며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롭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기도와 선행이 저를 예수 그리스도만큼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말합니다. "그런 말 안 해요".
그렇다면 그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사야 53:5)
사이먼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분은 나무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는 의에 대해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24)
사람들은 말합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영원한 죽음이 필요하다면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짧은 몇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죽음을 당할 수 있었을까요?"
간단합니다.
그는 육신으로 현현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분은 시간 밖에 존재하십니다. 그러니 문제 없습니다.
그가 육신으로 현현한 하나님이라면, 그와 함께한 시간과 영원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속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죄의 대가를 치르셨을 때, 그 대가는 창세기 1장 1절 이전부터 요한계시록 22장 이후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성령께서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읽지 않으셨나요?
배트맨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과 장례에 참여하게 되나요?
못 읽으셨나요?
폴이 말한 것을 읽지 않았나요? (현재 시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나쁜 성경 번역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펄프 잡지와 쓰레기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고 있습니다.
폴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현재 시제.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나는 새 생명으로 부활하여 새 길을 걷고 있지만,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라고 생각하라.
중요한 것은 고통의 양이 아니라 갈보리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당한 사람은 여러분이나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이신 분입니다(딤전 2:5).
그의 얼굴은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이 훼손되었고 그의 형태는 사람의 아들보다 더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이사야 52장 14절의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갈보리에서 어둠의 장막을 걷어 얼굴이 상한 사람을 가릴 정도로 끔찍한 죽음을 암시합니다.
멍이 들고, 두들겨 맞고, 찢어지고.
그리고 내가 구주의 피에 대한 관심을 얻어야 할 수 있습니까?
그분의 고통을 초래 한 나를 위해 그분이 죽었습니까?
나를 위해, 그가 죽음을 추구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놀라운 사랑!
나의 하나님, 어떻게 나를 위해 죽어야합니까?
그는 위의 아버지의 보좌를 떠났습니다.
그토록 자유롭고 무한한 그분의 은혜.
사랑 외에는 모든 것을 비우시고 아담의 무력한 종족을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모든 자비는 엄청나고 무료입니다.
오 마이 갓, 그것은 나를 발견했습니다.
놀라운 사랑!
나의 하나님, 어떻게 나를 위해 죽어야합니까?
당신을 발견했나요?
죄와 비애가 가득한 이 세상에 구세주를 보내신 것은 사랑이었어요.
하늘의 문을 떠나 지상에 내려온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사랑이었어요.
신성한 사랑.
숭고한 사랑.
어떤 바다보다 깊은 사랑.
우리 모두에 대한 사랑, 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당신은 죄인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놀라운 준비를 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생명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어서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심판 때 여러분을 위해 의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교회 회원의 세례 성례, 황금률, 성경적 알리바이라는 더러운 덫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 자신의 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있습니다.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