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신학 세미나: 2부
2023년 10월 8일
/오늘 여러분과 함께 신학 세미나를 시작하며 잠시 동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함께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 신격을 제대로 다루는 신학 과정의 첫 번째 과목인 말씀 신학은 여러 학문을 다루고 있으며, 물론 교리 신학, 실천 신학, 조직 신학, 성경 신학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시리즈에서는 하나님 말씀의 주요 교리를 다루고, 그 교리에 대한 성경 구절을 통해 성경이 그 교리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지난 방송은 하나님의 교리에 관한 일련의 방송 중 첫 번째 방송이었습니다.
이 파트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 자연으로부터의 논증, 경전으로부터의 논증, 자연으로부터의 논증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양심, 자연, 경전, 그것들은 모두 신의 존재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전 부분에서 말했듯이 무신론적 입장을 받아들이려면 엄청난 지적 부정직과 맹목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전 방송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은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격조차도 만들어진 것들에 의해 분명히 이해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언급될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는 하루 24시간 내내 태양을 통해 매일 우리에게 완벽하게 나타납니다.
태양에는 알파 베타 광선과 감마 광선, 즉 광선, 열선, 작용 광선의 세 가지 광선이 있는데, 이 광선 중 하나는 볼 수는 있지만 느낄 수 없는 광선으로, 볼 수 있는 곳에 나타난 아들의 종류이고, 다른 광선은 느낄 수는 있지만 볼 수 없는 열선으로, 성령의 종류이며, 세 번째는 물론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작용 광선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영혼의 종류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그 자체로 가톨릭 교리나 개신교 교리가 아니며, 삼위일체 자체는 세례교의 가르침이 아니며, 누군가의 사적인 신학적 해석으로 제한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는 성경 안팎의 모든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위대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 영 그 자체로 삼위일체입니다.
성경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고, 세 개의 하늘이 있으며, 셈 함과 이벳에서 비롯된 세 가지 주요 인간 분파가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론적 분류는 과거 현재 미래로 나뉘는 시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간은 높이와 너비와 넓이로 모든 곳에서 나타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신의 존재에 대한 몇 가지 주장을 더 고려합니다.
첫 번째는 도덕적 논증으로, 인류학적 논증이라고도 합니다.
인류의 주장.
인간은 동물에게 없는 지적 능력과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창조주가 단순한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적 도덕적 존재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대학 졸업생과 모든 주립 대학에서 가르치는 현대의 가르침은 신은 비인격적인 힘이라는 것입니다.
현대 과학의 신은 도덕이 없는 일종의 중성 에너지 힘장이며 매우 편리합니다.
그리고이 웅장하고 새로운 과학적 신은 물론 타락한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신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은 칭찬을 돌려주었다"고 누군가가 말했듯이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인간은 신을 발명하고 신을 만들어 내고 가게에 가서 카운터에 가서 자신이 선택한 신을 싸게 쇼핑하고 있다는 다소 냉소적 인 말을합니다.
박사 학위를 가진 현대의 교육받은 바보가 선택한 신은 도덕적 기준이 없는 무생물 중성 세력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성경에서 창세기 1장 26절을 읽어보세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을 본받아 사람을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시편 94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를 심으신 이가 듣지 못하시겠으며 눈을 지으신 이가 보지 못하시겠느냐? (시편 94:9)
하나님은 인간에게 귀, 눈, 지식, 지성, 의지력을 주셨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 자신이 소유하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한때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지만 타락하여 타락한 상태에서 여전히 신격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타락한 하나님의 축소판입니다.
인간은 오랑우탄이나 주머니쥐 또는 다윈의 가계도에 나오는 꼬리를 휘두르는 다른 동물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양심은 창조주로부터 인간을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거룩한 도덕적 존재로서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진리의 신, 창조의 신, 이 우주의 신이 현대인에 의해 온갖 방식으로 왜곡되었습니다.
현대인은 악을 혐오하지 않고 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현대인, 특히 교육을 받은 종교 과학적 유형의 인간은 의와 악이 앞뒤로 바뀔 수 있는 상대적인 용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들은 종종 너무 많이 앞뒤로 바꿉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고 선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도덕적 논거는 간단합니다.
인류학을 연구하는 인류학에서는 모든 인종과 모든 민족, 모든 유형의 인종, 모든 유형의 민족 문화에 걸쳐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문화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지구상에 살인을 도덕적 기준의 위반으로 간주하지 않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출애굽기 20:13)
그리고 우리는 거룩함을 다루는 교리에 들어갈 때 이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할 것입니다.
십계명의 해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성경 자체에서 해석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국방이나 개인 방어가 아니라 악의적 인 의도, 폭행 및 구타, 개인을 죽일 의도로 살인하지 말라.
성경은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생명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당신이 진화론자라면 모를까,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진화론자라면 생명은 죽음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다윈주의자라면 화석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선캄브리아기에 생명이 시작되었고, 이후 캄브리아기 지층과 중생대 및 신생대까지 점차 복잡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고 믿어야 하며, 그 생명은 무생물인 죽은 것에서 왔어야 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훌륭한 다윈주의자가 되려면 화씨 1700도 이상의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용암을 식히면 무기물에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화학 원소로 변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믿음에 대해 말하려면 믿음이 필요하죠.
3600도나 되는 용암 덩어리에서 무언가가 튕겨져 나와 녹은 용암 속에서 식어 광물이 되고, 그 광물이 생명체를 만들어낸다고요?
지금 인간은 다윈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금성과 목성, 그리고 그가 찾을 수있는 모든 곳에서 필사적으로 찾고 있으며, 우리 정부는 창세기 1 장을 전복하기 위해 500 억 달러 이상을 지출했습니다.
대단하지 않나요?
우리 정부는 다른 행성에서 생명체를 찾으려고 500억 달러 이상을 들여 생명체가 이 행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생명은 생명에서 비롯되며, 최초의 생명은 영생을 가진 존재로부터 왔음에 틀림없습니다.
물리적 생명체가 만들어지기 전에 어떤 생명체가 존재했어야 합니다.
똑바로 생각한다면 그런 생명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1:2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서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줍니다.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당대의 교육받은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로 와서 생명을 얻으리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5:12)
모든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자연 발생 이론은 권위있는 과학에서 거짓으로 판명되었으며 완전히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비록 그가 당신의 얼굴에 학위를 흔들지 모르지만, 더 이상 전 세계 어디에도 자연 생성을 믿는 교육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몇 명의 대학 교사를 찾을 수 있지만.
인생에는 시작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논리적이라면 유일한 논리적 대답은 시작은 하나님과 함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명 논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학적 논의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에서 우리는 일치로부터의 논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신론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만 늘릴 뿐입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시대부터 피타고라스와 아낙시메네스, 아낙시만데스의 시대까지 과학에 관한 책이나 과학 교과서를 통해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을 살펴본 적이 있다면 전 세계 어느 대륙에서든 인류가 안고 있던 주요 문제를 과학이 단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과학이 하는 일은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 오래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뿐입니다.
과학은 인류가 직면한 주요 문제를 단 한 번도 해결한 적이 없습니다.
질병의 문제는 해결된 적이 없습니다.
기아 문제도 해결된 적이 없습니다.
오늘 밤 800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들고 내일 아침이면 50만 명이 죽게 될 것입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과학자들이 인류의 주요 문제 중 하나를 해결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문제는 해결된 적이 없습니다.
빈곤의 문제도 해결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항상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6:11)
"노력 중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바보처럼 말하지 마세요. 당연히 노력 중이고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니까요.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죠.
다른 사람들은 땅콩 껍질을 벗기고 닭의 깃털을 따서 생계를 유지합니다.
그래서요?
무신론에 대한 두려움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만 늘릴 뿐입니다.
세상의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의 모든 사실, 과학의 모든 사실, 계시의 모든 사실, 지식의 모든 사실, 양심과 자연의 모든 사실을 맞추는 마법의 열쇠와 같습니다.
이 반박할 수 없는 교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의 위로 속에서 기꺼이 살고 죽기를 원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교리입니다.
성경은 마귀조차도 하나님을 믿고 떨고 있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2:19)
따라서 우리는 신의 존재에 대한 첫 번째 연구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무신론은 거대한 의심일 뿐이며, 그 불신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어둠과 절망과 재앙을 가져올 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무신론은 국가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고문하고 투옥하는 무정부주의, 이교도주의 또는 국제 사회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신론의 신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심지어 우주에서 온 외계인, 또는 그들이 발명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신이 없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 (창세기 1:1)
창세기 1장 1절을 받아들이면 진실한 구도자는 삼위일체로서, 창조주로서, 무엇보다도 구세주이자 구속주로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완전한 계시의 길로 인도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지적인 사람은 경전과 자연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 께 나아갈 것이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신은 잘못된 신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피조물에게 자신을 드러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는 불가지론 과학에 치명적인 타격을 줍니다.
인간은 말로 서로 소통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인간이 동물과 다른 피조물로서 다른 종으로 구분되는 것은 인간은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여 의사 소통을하고 동물은 도움을 청하는 외침, 배고픔의 외침, 쾌락의 외침, 도망 치라는 경고 또는 가까이 오라는 초대가있을 뿐 말로 의사 소통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 위에 신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자신의 피조물에게 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최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복음 1장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우리가 읽은 신학적 진리에서 매우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내용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요한은 요한일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저에게 생명의 놀라운 말씀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주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피조물에게 자신을 드러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떤 신이라면 이 세상을 창조하고 6000년 동안 고문 유혈 살인 강탈 변태 죽음 질병 가난 상심 기아 사별 전쟁 투옥으로 이어지도록 내버려 두겠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고 스스로 물러나서 가담하지 않는 신이라면, 돈을 벌기 위해 도덕성을 앞세우는 것과 맞바꿔야 합니다.
유신론과 이신론 모두 신을 가르치지만, 이 창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신을 가르치기 때문에 신학생이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반면에 성경의 하나님은 모든 요건을 충족합니다.
그는 내려 오셔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3:16)
그는 사람이 되셨고, 그리스도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슬픔을 아는 슬픔의 사람, 우리의 허물 때문에 상하고 죄악 때문에 상하고 징계를 받고 그의 줄무늬로 나음을 입은 사람이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이나 교사에게 성경의 하나님 만이 인간 본성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킬 수있는 유일한 신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만 이것을 말합니다.
다른 신은 쓰라린 실망과 사기꾼이고 다른 신은 사기꾼이며 계시의 신은 인간의 마음의 갈망을 충족시킬 수있는 유일한 신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자 아버지는 모든 종교에서 그의 피조물의 고통과 슬픔을 나누고 그의 피조물 대신에 죽고 그의 피조물에게 영생을 공짜 선물로 제공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심이있는 유일한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신들을 중고 에델과 낡은 요요와 함께 할인 카운터에 놓는 것이며, 사기이며, 인간 마음의 갈망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진짜를 대신하는 비극적 인 대용품입니다.
내가 말하는 사람들은 죄인이고, 죄는 내가 말하는 누구에게나 다가와서 손가락을 얼굴에 대고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들은 죄에 대한 승리가 필요합니다.
오늘 아침 제가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도덕적 기준을 바꾼다고 해서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내가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아프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 중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교육을 받았든 못 받았든 상관없이 그들은 당신을 상자 안에 가두고 삽으로 침대에 눕힐 것입니다.
어떤 신이 당신을 거기서 구해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가 직접 참여하지 않는 한 그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숭배하는 신이 원자와 양성자, 전자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우주의 중성자력이나 에너지 힘장에 불과하다면, 두 살짜리도 모르는 것에 대해 그가 정말로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좋아,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논리적 연구로 인도합니다.
신에 대한 연구는 수천 년 동안 철학자와 과학자들의 야망이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앉아서 명상하고 영원한 존재의 영역을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진정한 지식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현미경 관찰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시의 주체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출애굽기 33:20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고 살지 못하리라.
모세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보았지만 주님의 얼굴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된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7절부터 11절까지에서 빌립에게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입니다.
이교도의 지혜는 너 자신을 알라, 모하메드교는 너 자신을 복종하라, 현대 교육은 너 자신을 깨달으라, 로마교는 너 자신을 다스리라, 불교는 너 자신을 잠식하라,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게 하소서. (눅 9:23)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복음 11:28-30)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떻게 영생을 주시는지 읽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1932년에 열린 세계 종교 대 회의에서 수많은 종교의 유권자들이 모여 에큐메니칼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모든 사람이 인간의 형제애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해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로마 가톨릭 추기경과 주교, 그리스 정교회 장로와 총대주교, 개신교 집사, 설교자, 교사, 코란을 읽는 사람, 불교와 힌두교 전문가 등 고위급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셉 쿡은 거의 일주일 동안 토론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조셉 쿡이 일어나 손을 들고 말하기를, 이 붉은 오른손이 얼마나 깨끗한가?
이 인용문을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 인용문은 맥베스에 나오는 대사로 맥베스가 살인을 저지른 후 "이 붉은 오른손이 어찌 그리 깨끗한가?"라고 말합니다.
즉, 죄를 지었으니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에게 영구적으로 깨끗해지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종교는 없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그에게 죄를 고백하고 참회와 사죄를 받고 고행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국만을 바랄 수 있고 죽을 때까지 지옥에 갈지 안 갈지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이 사라 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개신교도들은 그에게 죄를 속죄하기 위해 선한 삶을 살라고 말했습니다.
불교도들은 그가 고귀한 팔정도의 길을 따랐다면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영원히 사는 영원한 존재에게 죄를 지었는데, 영원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어떻게 그 대가를 치를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7)
그리고 다시.
그분 안에서 우리는 그의 피를 통한 구속, 심지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골로새서 1:14)
하나님의 인격에 관한 다음 공과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물론 인격은 지식의 느낌과 의지력을 소유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상에는 인격이 없는데, 우상은 느끼지도 않고 반응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분명한 인격적 특성을 가진 인격체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입니다.
그분은 전기와 같은 영향력이나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가 아닙니다.
예레미야 10:10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14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허영심에서 벗어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세요.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은 개종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역대하 16장 9절을 읽습니다.
주님의 눈은 온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시며, 주님을 향한 마음이 온전한 자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강하게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움직이는 눈은 생명과 인격을 나타내며, 우리가 의인화 된 표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가 이해할 수있는 언어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우리는 구절을 통해 아버지에게는 두 눈동자와 눈꺼풀과 속눈썹이 없지만 그의 아들에게는 그것들이 있었고 그의 아들은 육신으로 현현 한 하나님이었고 그가이 땅에 계셨을 때 눈을 들어 추수기에 하얀 들판을 바라 보았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를 바라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물론 우리가 신이 영이고 주님의 눈이 온 땅을 왔다 갔다한다는 것을 아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의인화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경우 형태는 모르 포스, 사람은 안트로 포스, 사람의 형태에 비유되지만, 결국 사랑하는 불가지론자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려면 왜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당신이 소득세 양식을주고 평범한 영어로 그에게 말함으로써 동물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보고 싶습니다.
짐승의 영은 짐승과 소통하고 사람의 영은 사람과 소통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의인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한 사람의 영과 소통 할 수 없습니다. 의인화 표현은 사람의 표현이고 의인화는 사람과 같은 의미이고 의인화는 사람의 형태와 같은 형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눈과 마음과 코와 귀에 대해 말할 때 당연히 우리가 이해할 수있는 일반적인 평범한 언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학을 공부할 때 신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분이 인격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 파트에서는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통일성, 하나님의 자연적 속성,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학에 관한 세 번째 파트가 될 것입니다.
매주 웹의 신학 세미나에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 말씀의 위대한 신학 교리를 함께 공부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첫 번째 시리즈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하나님의 본성, 특히 아버지의 본성에 대해 다룹니다.
다음 공부까지.
주님의 축복과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