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신학 세미나 : 52부.
2024년 0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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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좋은 하루 되세요.
웹 신학 세미나의 또 다른 세션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가 공부한 주제는 성령론, 즉 성령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해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거스르는 죄.
소위 성령세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간에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보다 실제적인 측면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룰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사람들은 노동보다 유인물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회로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것에서 나타납니다.
세상에 필요한 것은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성령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항상 성령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은사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성령의 열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성령의 열매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을 생략합니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입니다.
현대의 카리스마적 에큐메니칼 운동은 두 번째 계명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보다 우선합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죄인에 대한 사랑이 앞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설명합니다.
두 번째 명령을 첫 번째 명령보다 우선시하는 그리스도인을 알아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그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요한복음 14:23)
따라서 신에 대한 사랑의 증거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이라는 모든 말도 안되는 말은 요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성경에서 알려지지 않았고 들어본 적도 없는 양자입니다.
현대 기독교에서만 나타나는 미지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말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사무엘상 15:22)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마태복음 24:35)
그리고.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복음 14:23)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사랑이나 영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그들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말투로 악수하며 포옹하는 육체적 사랑을 표현하고 건전한 교리에 대해 입을 다물어 누군가를 불쾌하게 하지 않는 사랑의 유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현대 인본주의 운동은 자유주의 운동입니다.
그리고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은 요즘 기독교 학교의 많은 교수진들이 잘 대표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근본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곳에서도 권위에 대한 자유주의적 접근 방식을 취합니다.
이제 이 사람들이 권위를 피하는 방법은 언젠가 신이 무오류하고 권위 있는 책을 쓴 것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고 아무도 찾을 수 없으므로 아무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다음은요?
그리고 그 답은 바로
그러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위를 갖게 됩니다.
또는 모든 학교가 자체 권한이 있습니다.
또는 자신이 권위자라고 생각하는 남자는 자신이 권위자라고 생각하는 다른 모든 남자와 논쟁을 벌여야 합니다.
무정부 상태입니다.
이것이 자유주의 모더니즘 교회의 입장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이 오늘 주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주제는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열매의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신자의 삶에서 성령께서 실제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주어진 특별한 은사들, 그중 많은 은사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사도적 표징입니다.
따라서 매우 관련성이 높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일부 사람들은 성령의 권위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들의 삶은 열매가 없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성령의 열매는 바로 사랑입니다.
성령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신자의 삶에서 성령의 적극적인 사역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또는 폴의 말처럼.
여러분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까요. (빌립보서 2:13)
성령의 열매는 그분이 내주하시고 우리가 그분께 굴복한 결과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23절은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를 매우 선명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열거된 육체의 일에는 17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아담적 본성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새 생명 안에서 역사하시는 결과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 열매가 주어집니다.
과일은 복수가 아닌 단수형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열매의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9명이 모두 참석할 때까지 완료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홉 가지 은혜 또는 성령의 열매를 모두 나타내지 않으면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선
이 세션에서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 논의할 것입니다.
다음 세션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논의할 것입니다.
당연히 어떤 사람들은 과일보다 선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결국, 선물은 자랑하고 과시하고 자신이 영적인 척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세션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물론 그리스도의 몸에서 여전히 활동하는 은사와 이스라엘에게 표징으로 주어진 은사를 구별하는 데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이려면 성령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항상 성령께서 자신을 인도하시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면서도 성경에서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일과 이 시대에 일어나는 일을 구분하는 데 매우 신중을 기할 것입니다.
일부 표적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장 22절).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이유는 민족이 표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3장 및 4장).
따라서 그들에게는 표지판을 볼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도들인 열두 사도의 존재 이유입니다.
모두 돼지고기를 기권한 사람들입니다.
안식일 준수.
사원 숭배.
할례를 받은 유대인.
그들은 마가복음 16장의 표적을 받아 이스라엘을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연구하기 시작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하며, 이 책을 쓰시고 은사를 주시고 표적을 주셨던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는데도 오늘날 교회에서 이 모든 은사들이 여전히 활동한다고 말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은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이미 알아낸 지 오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도다. (히브리서 13:8)
문맥은 해당 구절의 10장 내에서 성령의 은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제 무슨 뜻이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도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도 그도 하리라.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요한복음 14:12)
물 위를 걸을 수 있나요, 아니면 설교자가 걸을 수 있다고 믿나요?
기분을 좋게 하려고 믿기 힘든 이야기를 하는 일부 악당들의 말을 믿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도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모든 표적과 사도적 은사가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는 뜻인가요?
성경을 더 많이 읽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말미에 이스라엘을 위한 표징이 있고, 이스라엘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을 읽어보셨나요?
이 사람들이 사도행전 2장을 계속 인용하면서 사도행전 28장까지 가지 않는 것이 놀랍지 않나요?
이상하지 않나요?
이제 성령의 열매를 말해보세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는 아홉 가지 은혜가 하나의 단위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단수입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성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과 고린도전서 13장에 근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내주하심의 속성입니다.
이 성령의 열매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요한일서 4:19)
그리고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요한일서 4:10)
여기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요일 4:10)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칭찬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느니라. (로마서 5:8)
신자의 삶에서 성령의 첫 번째 현현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요한복음 14:23)
성경은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갓난아기처럼 진실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여 그로 인해 성장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커버부터 커버까지.
예를 들어, 성경을 믿고 구원받은 기독교인으로서 영적 은사와 오순절을 사랑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분의 말씀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1)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인쇄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디서든 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주시는데, 왜곡된 진리의 표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신자의 삶에서 사랑이 나타나는 세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5)
이것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생이 있다고 공언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요?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이라도 미쳐버리기 전에 미쳤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이 충분하지 않아요. 누군가가 충분한 사랑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사랑을 가지고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작은 교리적인 차이는 무시하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우리의 사랑으로 세상을 보여주자."
하지만 그 구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압니다. (요한일서 3:14)
이들 중 80%는 자신이 죽음에서 삶으로 넘어왔는지 여부를 모릅니다.
분명히 그들이 가진 사랑은 인본주의적인 사랑이며 성령의 열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성령의 두 번째 열매는 기쁨입니다.
이제 이것은 소위 이 세상의 행복이 아닙니다.
그들이 재미라고 부르는 것.
하지만 시련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르는 기쁨은 깊고 깊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세상에서 풍요로울 때보다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많은 영화배우가 자살하거나 약물을 복용해 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백만장자가 자살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재미는 있었지만 기쁨은 없었습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평화.
이것이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영혼을 완전히 만족시킵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
그리고 여러분도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 14:27)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세상에는 환난이 있으리라. 그러나 기운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요한복음 16:33)
마음의 평안과 평화가 없는 세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성령의 평화를 얻는 데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조슈아 리브먼은 '마음의 평화'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풀턴 쉰은 "영혼의 평화"라는 곡을 썼습니다.
그리고 빌리 그레이엄은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곡을 썼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골로새서 1:20)
그러나 이 사람은 죄를 위해 영원히 한 번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0:12)
이제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하지 못합니다. (요한일서 4:18)
여러분이 구원받고 영생이 있고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안심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은 위선자이거나 오해를 받았거나 성경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음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 즉 인내입니다.
자연인은 참을성이 없습니다.
새 사람, 새 본성.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같이 오래 참는 사람입니다.
다음 표현은 부드러움입니다.
친절함 또는 은혜로움.
예수님은 친절함 또는 은혜로 유명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드러움은 말투를 거칠게 하지 않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인자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세대여, 너희가 어찌 지옥의 저주를 피하겠느냐(마태복음 23:33).
인자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한복음 8:44)
온화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 누가 내게 죄가 있다고 확신합니까? 내가 진실을 말해도 왜 믿지 않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듣지 아니하느니라. (요한복음 8:46-47)
따라서 온유함이나 온유함에 대해 읽을 때.
이 구절에는 누군가 고개를 숙이거나 누군가가 그들을 밟고 지나간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필요한 곳에 이 속성 매니페스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얼마나 부드럽게 대하시는지, 니고데모에게는 얼마나 거칠게 대하시는지 주목하세요.
눈치채셨나요?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얼마나 부드럽게 대하셨고 가야바에게는 얼마나 거칠게 대하셨는지 보셨나요?
눈치채셨겠죠?
그가 와서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그의 발을 씻겨 준 여인에게 얼마나 온화했는지, 그와 함께 저녁 식탁에 앉은 주인에게 얼마나 거칠게 대했는지 보셨습니까?
성령의 다음 열매는 선함입니다.
이 덕목은 그리스도인을 선한 일로 가득 채우게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좋은 작품을 유지하기 위해 조심해야 합니다.
그는 구원을 받기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그는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일합니다.
다음 성령의 열매는 일곱 번째입니다.
온유하고 온화한 성품입니다.
그분은 겸손하시고 우리도 겸손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온유함으로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르치고, 하나님께서 모험을 통해 그들에게 진리를 인정하는 회개를 주실 것입니다;
이 온유함 또는 온화한 성질은 항상 온유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알아두세요.
온유하고 온화한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탁자를 발로 차서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채찍으로 사람들을 때리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 원수들을 불못에 던지겠다고 말씀하신 분은 온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성질이 온화하다는 것은 단순히 이성을 잃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당한 분노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나타날 때마다 당황할 수는 없습니다.
절제.
아홉 번째 열매는 자제력입니다.
기독교인은 술을 적당히 마십니다.
식욕이 적당합니다.
적당한 습관.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는 모두 앞서 갈라디아서 5장에 열거된 육체의 더러운 자연적 행위와 반대되거나 상반되는 것입니다.
과일은 죽음의 증거입니다.
신자가 죽기 전까지는 신자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2:24.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제외하고는 홀로 남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단지 육체의 작품을 낳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는 신자의 삶에서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기 때문에 무익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열매 없이 계속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는 열매 없는 무력한 기독교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다닙니다.
그들은 제단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지식으로 인도한 10명의 사람들에게 손을 얹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선물은 열매가 없는 죽은 나무이기 때문에 선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거실에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본 적이 있나요?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저 나무에 선물이 온통 걸려 있는 게 뭐가 문제인지 아세요?
죽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나무.
세상에서 가장 재능 있는 트리는 크리스마스 트리입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이제 과일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내 안의 모든 가지는 그가 제거합니다.
누가복음 13장 9절에서
그리고 열매를 맺으면 좋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후에는 잘라내야 합니다.
회심 후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자는 열매 맺은 자의 특권을 오래 누릴 수 없습니다.
무익함과 하나님의 은혜는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3장 7절에 보면, 남편이 와서 말했습니다.
내가 3년 동안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를 찾으러 왔으나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잘라내라고 하셨어요.
야고보서 5장 7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농부는 땅의 귀한 열매를 기다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삶에서 진정한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는 없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요.
외모와 직업이 좋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증거는 바로 열매입니다.
나무가 망고인지 사과인지 식별합니다.
그가 성인이든 배교자이든 상관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 16~20절에서
남자는 가시 포도를 따나요, 엉겅퀴 무화과를 따나요?
성도는 육체의 일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이 저주와 축복, 달콤함과 씁쓸함의 역설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열매의 출처는 호세아 14장 8절에 나와 있습니다.
나는 푸른 전나무와 같습니다. 나에게서 당신의 열매가 발견됩니다.
열매의 출처는 요한복음 15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거하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않고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근거를 두는 한 열매가 풍성합니다.
에베소서 3:17-18.
그리스도가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 안에 거하시도록.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근거를 두게 하소서. 여러분은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게 한 것입니다.
씨앗이 열매입니다.
열매는 번식의 원천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땅이 그의 동족을 따라 열매를 맺는 과일나무를 낳게 하소서. (창세기 1:11)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인을 배출해야 합니다.
목회자라면 목회자를 배출해야 합니다.
성경 교사라면 성경 교사를 배출해야 합니다.
설교자라면 설교자를 배출해야 합니다.
또는 골로새서 1장 10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해집니다.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면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우리 삶에 영적인 열매가 없으면 번식할 수 없습니다.
재현했나요?
재현하셨나요?
여러분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그리스도께 인도한 사람 다섯 명을 꼽을 수 있나요?
그리고 그들 각자가 적어도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까?
할 수 있나요?
오늘 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면.
여러분의 개인적인 증거를 통해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 중,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이후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다섯 명에게 손을 내밀어 보시겠어요?
그럴 수 없다면요.
가서 시도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이제 다음 주에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단원에서는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다음 세션에서는 고린도전서 12장을 주로 다룰 예정입니다.
바울이 신약 성경에서 가장 육신에 속한 교회를 언급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현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