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신학 세미나: 3부
2023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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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신학이 시작하기에 적절한 장소인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공부하는 것으로 공중 신학 세미나를 시작합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학문,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물론 신학에는 종말론과 인간론, 고고학, 교회론, 종파론, 인류학 및 기타 주제와 같은 다른 많은 연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처음부터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시작해야 할 곳, 성경이 시작되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 (창세기 1:1)
오늘 우리의 공과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우리는 전에 언급했듯이 성경은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제시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현대의 교육자들과 똑같이 중성적인 힘장과 에너지 힘을 원했고, 전교조와 보건교육복지부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반대는 그것이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인격적 존재를 제시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연구는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의 야망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앉아서 명상하고 영원한 존재의 영역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참된 지식은 성경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TM, 구루, 라마크리슈나, 경전, 샤스타, 푸라나, 트리피타카, 바가바드기타 등은 훌륭한 정신 분석가가 심리 치료에서 할 수 있는 것처럼 일시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으며, 우리가 내면의 평화라고 부르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죄인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옳다는 착각이나 망상을 일시적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평화는 약물에 의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평화를 향한 광적인 추구는 현대인의 상태를 보여주는 증거일 뿐입니다.
중생하지 않은 현대인이 역사에 대해 갖는 특유의 긍정적 인 접근 방식은 때때로 안전이 부족한 상태에서 평화와 사랑, 사랑과 평화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성서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이 매우 사소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에는 평화로운 것이며, 그리스도의 위대한 칭호 멜기세덱은 그를 먼저 의의 왕으로, 그 다음에는 평화의 왕으로 식별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상에 평화, 인간에 대한 선의"라는 인용문이 성경 인용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모든 대통령과 교황이 인용한 '지상에 평화, 인간에 대한 선의'는 성경에서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 인용문이 아니라 성경 인용문이 시작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누가복음 2:14)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앉아서 명상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우리는 이렇게 읽습니다.
아버지의 품에 있는 독생자를 본 사람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4장 12절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모세는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 모습을 보았습니다.
인격은 이전 부분에서 말했듯이 지식 느낌과 의지력을 소유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손과 발을 보라 나 자신임이니 나를 만져보고 보라 영은 너희가 보는 것 같이 살과 뼈가 없느니라. (눅 24:39)
하나님은 영이시니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3:24)
디모데전서 1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영원히 불멸하시고 보이지 않으시는 유일하신 지혜로우신 왕께 영광을 돌립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불멸의 존재이시며, 사람이 다가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며, 사람이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주 우리 하나님은 복수의 이교도 신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나의 신입니다.
라마크리슈나와 비슈누, 일곱 오시리스가 있는 신들의 판테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한 분이신 여호와이시다. (신명기 6:4)
이사야 44장 6절에서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내 옆에는 신이 없느니라.
그때부터 누가 말했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공의로운 신이시요 구세주이시니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이사야 45:21)
신은 인격, 지성, 지식, 감정, 의지력을 가진 인격적인 신으로서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고 반복해 왔습니다.
물론 위대한 라마크리슈나 바하바기타 니르바나 프라즈나 소마티 존재의 상태는 감정이나 의지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사람이 아닌 존재로 침잠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자 아버지는 인격체이시며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고, "예수"라는 사람의 이름을 가지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에게는 자연적인 속성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신학에서 "전달할 수 없는 속성"이라고 부르고 다른 속성을 "전달할 수 있는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전달할 수 없는 속성은 우선 하나님의 무한성, 불변성, 광대함입니다.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영으로서, 그리고 인격으로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전달할 수 없는 어떤 타고난 특성을 가지고 계시며, 인간은 자연적인 능력이나 추론이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항상 독선적인 불가지론자나 독선적인 무신론자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신은 어떤 것의 질적 속성 또는 고유 한 특성 인 특정 자연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은 몇 가지 기본적인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영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의 무한함, 영원함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의 불변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모든 권능을 소유하고 전능하십니다.
우리는 신이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편재성 또는 고전 신학자들은 무소부재라고 부릅니다.
그는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전지전능, 전지전능이라고 부릅니다.
요컨대, 신은 그 자체로 지적인 생명체이자 모든 생명의 저자이자 창조자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신은 무한하고, 불변하며, 변하지 않고, 영원하고, 전능하고, 존재하며,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은 황금률, 십계명, 그리고 성경을 잘못 인용하여 스스로를 파멸시키려는 사람들의 다른 말도 안되는 속죄 또는 속죄의 근거를 제외하고는 죄인과 함께 지낼 수 없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참 하나님이 되려면 그분은 시작도 끝도 없어야 합니다.
그는 영원해야 하며, 이교도 그리스 철학자들이 우리가 물질의 영원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믿기 때문에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우주와 하늘보다 더 영원해야 하며, 물질적인 것이 영원하다고 믿었습니다.
물질이 영원하다는 믿음에 대해서는 인류학과 창조의 교리에 들어가면 더 자세히 논의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모든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이 영적 존재의 영원성을 믿는 것처럼 물질의 영원성을 믿으려면 훨씬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결국 밀리켄 박사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불쌍한 신사에게 천 달러를 주었지만, 밀리켄 박사가 태어나기 약 1800년 전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언급했지만 히브리서 기자에게는 그것을주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원자 이론이 정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3)
따라서 물질의 영원성을 믿는 사람은 매우 비과학적이고 지적으로 부정직 할뿐만 아니라 다소 바보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우상(조각상)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시작이 있다는 점에서 실격입니다.
시편 90편 2절에서 우리는 읽습니다.
산이 생겨나기 전부터, 또는 땅과 세상을 지으시기 전부터, 심지어 영원부터 영원까지, 당신은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우리는 이렇게 읽습니다.
태초에 하나님.
신은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변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말라기 3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이기에 나는 변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좋은 은사와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내려오시며, 변덕도 없고 변함도 없는 빛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며, 이스라엘의 힘은 회개해야 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줄을 서거나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행하십니다.
창세기 6장, 7장, 8장에 나오는 땅의 멸망과 같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기록으로 남기신 약속이 1100여 개가 넘고,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법령이 없는 유연한 상황에 대해 주님께서 마음을 바꾸실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회개 없이는 변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불가분의 속성에는 모든 능력이나 전능의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는 신이 아닐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1)
이것이 바로 창의력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 (창세기 1:3)
말씀을 통한 힘과 권위.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 존재했거나 앞으로도 존재할 교회의 법령을 훨씬 뛰어넘는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며,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빛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비를 존재하도록 말할 수 없고, 번개나 천둥을 존재하도록 말할 수 없으며, 생명을 존재하도록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존재하는 물질로 사물을 만들지만,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물질로 선하고 완전한 사물을 창조하십니다.
창세기 1장 4절 인용문을 주목하세요.
좋았어요.
욥기 42장 2절에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어떤 생각도 보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니 이루어졌고 그가 명령하시니 굳게 서셨도다. (시편 33:9)
주님은 예레미야 32:27에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나는 여호와라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니 내게 어려운 일이 없겠느냐?
물론 신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이 움직이지 않는 바위를 움직일 수 있을까, 아니면 신이 너무 무거워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창조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많이 들었죠.
제가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을 때 이사회에서 저를 불러서 저항할 수 없는 힘과 움직이지 않는 물체가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당신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죠.
저항할 수 없는 힘과 부동의 물체가 만나면 저항할 수 없는 힘은 멈추지 않고 휘어지고 부동의 물체는 움직이지 않고 산산이 부서집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과 본성의 결정적인 속성으로 인해 자신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고, 한 번 약속하신 말씀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아래서 당신의 죄를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죄인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후에 지옥에 넣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 불의한 사람을 위해 한 번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다시는 고난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무엇이든 하신다고 이야기하지만 물론 그분이 스스로 정하신 한계의 범위 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존재로서 거룩함은 그분의 전염 가능한 속성 중 하나입니다.
거룩한 존재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거룩한 존재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의로움과 거룩함과 선함 인 그의 본성을 위반하는 일을하지 않으실 것임을 절대적으로 확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과 일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1억 5천만 명을 천국에 가도록 선택하시고, 1천 5백억 명을 지옥에 가도록 저주하실 것이며, 그들이 심판을 받으러 와서 "나는 죄 값을 치르지 않아서 구원받을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비웃으며 "운이 없었어,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라고 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속죄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당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들도 있겠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구원을 받도록 강요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강압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편재성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전 스콜라 신학에서 "하나님의 광대함"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하십니다.
열왕기상 8장 27절에 나오는 다윗의 말을 주목하세요.
그러나 하나님이 과연 땅에 거하시겠느냐 보라 하늘과 하늘의 하늘이 너희를 다 담지 못하겠고 내가 지은 이 집은 더욱 그러하리라.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랴 주의 면전에서 어디로 피하랴?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며, 내가 지옥에 내 침상을 만들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아침의 날개를 타고 바다 가장 깊은 곳에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리이다. (시편 139편 7-10절)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가까이 계신 신이시며 멀리 계신 신이 아니니이까? 누구든지 내가 보지 못하도록 은밀한 곳에 숨을 수 있겠느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내가 하늘과 땅을 채우지 아니하겠느냐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예레미야 23:23-24)
당신의 머리털 하나하나를 아시는 주님,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주님은 나선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시는 주님,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주님입니다.
그는 나선은 네 아버지 모르게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당신의 머리털에 번호가 매겨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와 주먹 싸움을 벌이고 나에게 화를 내지 마세요.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만유"를 충만하게 채우시는 그분의 충만하심에 대해 읽습니다.
한 번에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
목성에 갈 수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없습니다.
금성에 도착하면 그는 여전히 당신의 이빨 중 어느 것이 가장 먼저 썩을지 알고있을 것입니다.
금성에 가서 정착지를 세우려고 돌아와도 우주선에서 읽은 포르노 잡지에 대해 주님은 여전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는지 아시겠어요?
그들은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더러운 삶에서 그들은 검진을 받을 여유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살피시며, 주님을 향한 마음이 온전한 자를 대신하여 자신을 강하게 보이십니다. (역대하 16:9)
주님은 옷장 속에 숨겨놓고 "이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볼 수 없겠지"라고 말할 수 있는 작은 조각상 같은 분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는 아무것도 숨겨져 있지 않으며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악의 일꾼들이 숨을 수 있는 어둠이나 죽음의 그림자는 없습니다. (욥기 34:22)
욥은 고백했습니다.
어떤 생각도 숨길 수 없습니다. (욥 42:2)
그리고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그의 이해를 구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40:28)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허탄한 말은 심판 날에 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6)
언젠가 하나님은 지난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에 당신이 타고 있던 차를 가져다가 정어리 깡통처럼 찢어 버릴 것이고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하나님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언제 일어나고 있는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누가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요점은 교육은 사람이 자신의 상식과 이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데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은 종종 인간의 삶을 망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한 유명한 교육자는 "구원에 대한 교육은 저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찾기 어렵지 않습니다.
교육은 사람의 마음을 넓히고 열린 마음을 갖도록 가르치고 입구가 넓어짐에 따라 약간의 쓰레기를 삽입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수준 이상, 특히 대학 수준 이상의 교육의 큰 핸디캡 중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무차별 적으로 혼합하고 분별력 부족을 가르치는 에큐메니칼 스모 가스 보드의 까치 둥지입니다.
오늘날 교육받은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도덕적으로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설정할 때 얼마나 분별력이 있고 얼마나 정확한지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디지털 시스템과 효소, 유전자와 염색체, 아미노산, 유전자 코드, 연쇄 반응과 같은 과학적 사실에 대한 검증된 문서를 보고 있자면 놀랍습니다.
이분들이 얼마나 극도로 정확하고 세밀하고 정교한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당신이 그들의 단어 중 하나를 잘못 발음하면 심장 마비를 일으킬 것입니다.
"분명히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발음이 틀린 거야"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이 맹목적인 바보들이 도덕적 문제, 윤리적 문제, 영원과 옳고 그름, 천국과 지옥에 관한 문제를 붙잡고 있을 때.......
그들이 얼마나 부주의하고 엉뚱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는지 보면 놀랄 것입니다.
삶에 대한 접근 방식에 객관적인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 교육받은 사람은 평생 동안 하루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험관 또는 미시적 접근 방식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위선자들은 도덕, 종교 및 윤리 문제에 관해서는 그것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아는 한 교육받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이 글을 읽거나 듣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는 이 세상의 희망이 모든 종교를 하나로 모으고 각 종교의 공통 요소를 확대하는 대신 차이점을 확대함으로써 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아멘.
재생되지 않는 마음에게는 좋은 말이죠.
왜 그것이 광기의 절정인지.
모든 화학 원소가 같은 것처럼 가장해서 달에 로켓을 쏘아 올린 게 그런 방식인가요?
과학적 진보에 대해 얘기하잖아요.
에디슨도 그렇게 했나요?
갈릴레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도 그렇게 했나요?
얼마나 많은 것을 똑같이 만들어서 다르게 보이게 할 수 있는지 보는 것이 아니 었습니다.
이제 누구를 속이려고 하나요?
과학적 방법은 다양한 접근 방식과 다양한 이론을 분류하고 통제된 조건에서 테스트하여 차이점을 식별하고 가능한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이라고 공언하는 이 교육받은 사람들이 종교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는 거꾸로 들어오는 박쥐처럼 장님이 되어 욕조에서 볼링공을 찾지 못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오늘날 어떤 주요 종교에 살아 있는 구세주가 있는지 말해 보세요.
그리고 오늘날 어떤 종교가 창시자의 시신을 찾을 수 있다면 종교가 아닐까요?
예를 들어 하나만 말해 보세요.
지금 여기 모든 종교가 똑같다고 말하는 미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며, 그 중 하나의 시신을 찾을 수 있다면 종교 전체가 창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명백한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죽은 시체가 불교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이유.
무함마드의 죽은 시체는 모하메드교의 수행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공자의 죽은 시체도 유교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시체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종교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다 똑같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당신이 손에 넣을 수있는 종교 책은 없지만 미래에 대한 1500 가지 세부 사항을 예언하고 역사상 한 치의 오차도없이 모두 실현되었습니다.
무슨 책이죠?
샤스타스도 아니고, 피라나스도 아니고, 바가바드기타도 아니고, 트리파타카도 아닙니다.
예언자 칼릴 지브란이나 예언자 진 딕슨, 예언자 에드거 케이시의 저서에는 한 사람이 태어나기 전의 삶에 대한 1500가지 세부 사항을 예언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전 세계 어떤 종교도 이에 필적하는 예언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 바빌론의 재건, 적그리스도에 의한 연합국의 점령, 형성 될 10 개의 연합 왕국, 휴거, 재림, 두 증인, 적 그리스도, 짐승의 표, 천년, 곡과 마곡의 전투, 아마겟돈 전투, 진노의 대접, 환난, 환난의 기간, 환난의 시간 또는 환난에 관련된 인물에 대해 아무것도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종교와 성경의 기독교를 비교하면 결과는 노골적입니다.
그 이전에도 계시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계시를 읽을 수 있으며, 편재하고, 불변하고, 무한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경의 말씀이 옳다면, 당신은 당신의 무지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고의적 무지"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불가해한 속성, 그분의 본질적인 본성의 일부인 속성을 알지 못할 수도 있으며, 아마도 당신의 작고 연약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원성이나 하나님의 광대 함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전달 가능한 속성에 대해 공부할 것입니다.
즉, 신격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류에게 전달할 수 있는 속성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완전히 영원하고 무한하며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항상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존재로서 존재합니다.
물론 유한한 마음으로는 이러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전달 가능한 속성,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속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해하고 파악할 수있는 것입니다.
다음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전달 가능한 속성에 대해 다룰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신실하심.
또한 하나님의 동정심, 진실함, 질투심, 위대함, 완전함 등과 같은 전염 가능한 속성도 있습니다.
다음 파트에서는 하나님의 전염 가능한 속성에 대한 신학적 주제를 다룰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달할 수 없는 속성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무한성 또는 영원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불변성, 즉 그분의 변하지 않으심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전능하심, 즉 그분의 능력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의 편재성, 즉 그의 광대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모든 지식, 즉 그의 전지성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분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계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주님의 주님이십니다.
성경은 이 땅에 사람으로 육신을 입고 내려오신 이 위대한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전능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으로 내려오셔서 인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에 대해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니 곧 예수 이름에 모든 무릎을 꿇고 모든 머리를 조아리고 모든 혀를 예수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주님의 축복과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