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신학 세미나: 4부
2023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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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신학 공부를 계속하고 있으며, 이 첫 몇 주 동안 우선적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연구, 특히 신격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리고 기독론이라고 불리는 아들에 대한 축복을 계속하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교훈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성령론이라고 불리는 성령에 관한 교훈이 이어집니다.
신학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다루며, 이 첫 12부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균형 잡힌 존재로서의 하나님.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하나님의 침묵.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두렵게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여러 번 발견되는 유명한 표현 인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전갈자리 노트에서는 근본주의자들을 너무 많이 화나게 하지 않기 위해 그 표현을 경건한 경외심으로 톤 다운시켰습니다.
요즘에는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만으로는 배울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항상 영속적인 책이고, 최신의 책이며, 새로운 책이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보다 몇 년 앞서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자료를 제시하고 회의론자들이 머리가 서는 것을 지켜보기 만하면됩니다.
이제 오늘 우리의 공과는 우리가 "하나님의 전염성 있는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룹니다.
하나님의 전달 가능한 속성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달할 수 있고 인간이 이해할 수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특성을 의미합니다.
유한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광대함이나 영원성 또는 불변성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노력할 수 있지만 항상 살았고 항상 살았고 항상 거기에있을 존재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유한한 두뇌를 가진 인간이 신의 본질을 파악하거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신을 거부하는 교육받은 인간의 알리바이입니다.
그는 방울뱀의 딸랑이를 설명하지 못하고 방울뱀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며 방울뱀 굴에 가서 노는 두 살짜리 아이와 비슷합니다.
교육을 받은 사람이든 받지 않은 사람이든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전달 가능한 속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달 가능하다는 것은 신이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유로만 우리가 하나님과 같지 않고 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라와 사람들을 다루시는 것을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다루시는 것을 연구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반드시 성경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베드로전서 1:16)
그리고 우리는 이름이 거룩하신 주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구절을 읽습니다.
특히 출애굽기 15장 11절과 이사야 6장 3절에 주목하세요.
여호와여, 신들 중에 주님과 같은 이가 누구입니까? 주님과 같이 거룩하심으로 영광스럽고 찬송을 두려워하며 기적을 행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출애굽기 15:11)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외쳐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온 땅이 그의 영광으로 가득하도다. (이사야 6:3)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존중하지 않으시고 죄를 다루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 이러한 구절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쟁은 현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고 지옥은 내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어떤 사람이 눈을 뜨고 병원, 감옥, 정신병원, 이혼 법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 하나님이 죄를 참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요인이 복잡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항상 정확히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 사건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단지 사고 나 불행 또는 비극적 인 사건 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Z와 S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또는 S와 T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렇군요. 다음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 도덕적 속성은 바로 의로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시편 116편 5절과 에스라 9장 15절을 읽어보세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니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도다 (시편 116: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오늘과 같이 아직 피하지 못하였나이다 보라 우리가 우리의 허물로 주 앞에 섰나이다 이 때문에 주 앞에 설 수 없나이다. (에스라 9:15)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 저자의 위대한 교리 논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10장에서 다음과 같은 위대한 구절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무지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하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위한 율법의 끝이 되셨으니. (로마서 10:3-4)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의 가장 큰 주제입니다.
9장 14절입니다.
하나님과 불의가 있습니까?
3장 26절에서 이 말이 어떻게 계속 나오는지 보세요.
이 시간에 그의 의로움을 선포합니다.
3장 21절.
그러나 이제 율법 없이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의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 사람이 성인이 되고 구원받은 죄인이 된 후에도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습니다.
성령은 여전히 우리가 성도의 의라고 말하는 세마포라고 부르는 것을 생산하도록 도와 주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주여, 주님은 의로우십니다. (예레미야 12:1)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우리는 종종 그분의 섭리적인 처사에 대한 우리의 태도나 반응에서 그분을 불의한 분으로 간주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 청구서를 지불하고 배에 건강과 음식이 있고 등에 옷을 걸친 채 여기에 앉아 하나님이 옳고 실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나 신장 기계에 의지한 어린 소녀가 1만3천 달러의 병원비를 지출한 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옳은 일을 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틀렸고 하나님은 옳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 교육은 교육이 아닙니다.
요나가 고래 대학에 가서 고래에 대한 커리큘럼으로 졸업 한 것처럼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옳고 인간은 틀렸다고 가르치지 않으면이 세상 열 우주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시편 145편 17절을 읽어보세요.
여호와는 그의 모든 길에서 의로우시며 그의 모든 일에서 거룩하십니다.
이것이 욥기의 위대한 주제입니다.
의인은 왜 고난을 겪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욥을 대하실 때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으셨을까요?
욥이 정의롭고 의로운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욥을 부당하게 대하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은 참되시지만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로마서 3:4)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이것을 알고 있으며, 이것은 전염 가능한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인간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시편 103편 8절을 주목하세요.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성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이것을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요점을 벗어난 것입니다.
요점은 그것이 당신에게 분배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나님이 저를 도우소서, 하나님이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나님이 저를 여기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이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도우셨고 하나님은 당신을 꺼내 주셨습니다.
이제 당신이 그의 아들을 거부함으로써 보답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내가 아니라 당신의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 롭습니다. (당신에게 두 번째 기회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모든 사람에게 선하시며 그분의 부드러운 인자하심이 그분의 모든 행하심 위에 있느니라. (145:9)
성경은 시편 103편 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성하십니다.
시편 86편 15절은 하나님에 대한 이 위대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드러냅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긍휼이 충만하고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고 자비와 진리가 풍성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 중 하나는 그분의 오랜 고난입니다.
민수기 14장 18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심이 크시며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십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죄인들을 참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악한 악인은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그의 통치를 내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원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통사고에서 구해 주셨거나 병원에서 꺼내 주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적으로 받아 주셨다고 생각하고 구속과 구원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기념으로 받으셨고 그의 선한 일을 하나님 앞에 기념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여전히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요한복음 3장 3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다시 로마서 9:22.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나타내시고 자신의 능력을 알리시려고 멸망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셨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는 자비의 그릇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려고했습니다. (로마서 9:22-23)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말할 때 그분의 진노에 대해 말하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이시며 균형 잡힌 존재이시기에 평화를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안아주고 뽀뽀해 주시고 지옥에 보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니까요.
나훔서 1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질투합니다.
사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이 사실을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은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영에 속한 사람에게는 분별이 없으므로 알 수도 없음이라. (고린도전서 2:14)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하나님이고 완전하신 분이 어떻게 질투하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인간의 모든 속성이 하나님 안에서 천 배로 확대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경이 옳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의심의 여지없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에게서 찾을 수있는 속성은 사람의 창조자에게서도 발견 될 것입니다.
아무리 백만 배로 확대해도 그 강렬함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목소리를 듣는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을 꿇고 죄가 되는 것을 생각했을 때 느꼈던 고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죄 많은 인간을 위해 죄가되고 아버지의 진노 아래 저주가되었습니다.
그 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생 단 한 번도 불순한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수십만 배로 확대됩니다.
질투는 나쁜 일과 사악한 일로 변할 수 있지만.
진노는 잔인하고 분노는 터무니없습니다.
그러나 질투와 두려움은 인간이 느끼는 최악의 감정 중 두 가지이며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지만 올바르게 사용하면 정확하고 거룩한 진정한 본성의 일부이지만 누가 질투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이제 제 자신을 설명하겠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를 탐하게 만든 것은 질투였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도 우리처럼 약해졌느냐 너희도 우리와 같이 되었느냐 하리라. 너의 화려함이 무덤으로 내려가고 너의 비파 소리가 들리며 벌레가 네 밑에 퍼지고 벌레가 너를 덮었도다. 아침의 아들 루시퍼여, 네가 어찌하여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네가 어찌하여 땅에 잘려서 열방을 약화 시켰느냐! 네가 마음 속으로 말했듯이 나는 하늘로 올라갈 것이며 하나님의 별들 위에 내 보좌를 높이리라: 나는 또한 북쪽 측면에있는 회중의 산에 앉을 것입니다: 내가 구름 높이 위로 올라갈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이처럼 되리라. (이사야 14:10-14)
가인이 아벨의 머리를 쳐서 살인자로 만든 것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이집트로 노예로 팔아넘긴 것도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선택하셨을 때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민수기 15장)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질투 때문이었는데,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헤롯은 대제사장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자신에게 넘겨준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동기는 질투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권위와 능력, 말씀에 대한 그의 지식을 질투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청중,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질투했습니다.
그들은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결과를 얻는 그의 능력을 질투했습니다.
중국 아프리카와 유럽이 미국이 국제 사회주의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들의 복지와 돈, 산업과 생활 수준을 부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함으로써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이미 시작된 것처럼) 그들은 생계를 위해 이 땅을 뒤지는 다른 이교도 국가들보다 더 나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질투는 진정한 동기입니다.
질투는 옳은 것을 지키기 위한 본보기로 주어졌습니다.
바울이 당신을 질투한다고 말할 때 그는 "나는 경건한 질투로 질투한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 시기하고 싶어합니까? (야고보서 4:5)
그것은 성령께서 그에게 속한 사유 재산에 대해 염려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족을 하나로 묶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질투입니다.
남자는 누가 아내를 건드리든 상관하지 않고, 여자는 누가 남편을 건드리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가정이 아닙니다.
이제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사랑하시고 그들을 보호하기를 원하십니다.
자녀의 안전과 복지 및 보안에 대해 질투하지 않는 부모는 정상적인 부모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자연스러운 애정"이라고 부르는 정상적인 부모라면, 부모의 방식이 아닌 세상의 방식으로 자녀를 훈련시키려는 세상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지만,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진노의 하나님이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수아 24:19을 읽어 보세요.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섬길 수 없나니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라 너희 허물과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같은 신이 말씀하셨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셨다. (로마서 12:19)
나의 분노에 불이 붙었으니 가장 낮은 지옥까지 타오를 것이다. (신명기 32:22)
이렇게 말씀하신 신이시죠.
어린 아이들도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 (마태복음 19:14)
말했다.
뱀들아, 독사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저주를 피할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23:33)
이렇게 말씀하신 신이시죠.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8)
말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할 것이니라. (요한복음 8:44)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하며 많은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악마처럼 살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사람을 죽이실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은 말합니다.
육신을 좇아 살면 죽으리라.
그리스도인에게 쓴 글입니다.
요한일서 5:16.
죽음에는 죄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러나 사랑은 신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라. (요한일서 4:10)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여 주셔야 했던 모든 사랑은 갈보리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읽습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의지하는 자나 달리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로마서 9:16)
하나님께서는 갈보리에서 거듭나지 않은 세상에 자비를 베풀기로 선택하셨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비를 원한다면 갈보리로 가면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피를 같은 장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20장 28절에는 이를 하나님의 피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피로 구입했습니다.
기독론과 동정론을 공부할 때 이에 대해 더 공부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하나님의 전달 가능한 속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사랑입니다.
이 사랑과 자비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의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가 피 묻은 십자가에 찔려 피 흘리는 피 묻은 나무 남자에게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요구 사항을 충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이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속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의지하는 자나 달리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로마서 9:16)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실 방법을 결정할 수 없으며, 당신의 방식으로 자비를 베풀 수 없습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실 장소를 보여 주셨고 당신이 그 장소 (십자가)에 올 때까지 하나님의 진노의 칼이 당신을 겨냥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 칼을 치우지 않으실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무력한 피 흘리는 등에서 그 칼을 뽑아내신 곳으로 오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신명기 7장 9절을 읽어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자기를 사랑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언약과 인자를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인 줄을 알라.
그리고 신명기 32장 4절입니다.
그는 반석이시요 그의 일은 완전하시니 그의 모든 길은 공의로우시며 진리의 하나님이시요 죄악이 없으시며 공의롭고 옳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위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8~9절을 읽어보세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이 없게 하시려고 끝까지 여러분을 확증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여러분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교제에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니까요.
그리고 그는 우리를 끝까지 확증하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을 읽어 보세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바로 이 일을 확신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3절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읽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더라도 그는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할 수 없으십니다.
이제 그 엄청난 약속을 보세요.
그 약속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거듭나면 나중에 불가지론자들과 회의론자들이 그를 설득할 때까지 계속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지 아니하면 그는 신실하사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시느니라. (디모데후서 2:13)
이제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구원받은 적이 있다면 여전히 구원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듭난 적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여러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방법은 지구상에 없습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였나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태복음 7:23)
그가 당신을 알았을 때.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 넣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가라"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또는 노래가 말하듯이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 오 하나님 내 아버지여 주와 함께 돌이킬 그림자도 없도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것을 배울 수 있고, 그분을 시험함으로써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책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교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문제는 당신이 그를 시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하나님의 전달 가능한 속성에는 그의 신실함과 오래 참으심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 하늘에나 아래 땅에나 당신과 같이 온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 행하는 당신의 종들과 언약과 인자를 지키는 신이 없나이다. (열왕기상 8:23)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죄인을 길에서 가르치시리로다. (시편 25:8)
신은 진실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왕이십니다. (예레미야 10:10)
하나님은 썩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과 새와 네 발 달린 짐승과 기는 것과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로마서 1:23)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니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도다 (시편 116:5)
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영원하시고 불멸하시고 보이지 않으시며 유일하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리이다. 아멘. (디모데전서 1:17)
하나님은 정직하십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죄인을 길에서 가르치시리로다. (시편 25:8)
하나님은 완벽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
그리고 그것을 감고 캡스톤을 씌우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온 땅에 나 같은 사람은 없다. (출애굽기 9:14)
우리 하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왕 중의 왕, 만주의 주이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 창조주, 구속자, 구원자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고, 경배하고, 두려워하고, 섬기고, 순종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잠언 9:10)
다음 주에는 균형 잡힌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다루는 시리즈 공부의 다섯 번째 부분을 다룰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달 가능한 속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분의 거룩함.
그분의 사랑.
그분의 자비하심.
그리고 그분의 신실하심.
다음 주까지.
주님의 축복과 좋은 하루가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