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신학 세미나: 5부
2023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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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좋은 아침입니다.
이전 수업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달 가능한 속성과 전달할 수 없는 속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올바른 신학 연구 또는 하나님에 대한 연구에 속합니다.
물론 이와 관련된 과목으로는 그리스도를 연구하는 기독론, 영의 세계를 연구하는 영론, 귀신을 연구하는 귀신론, 죄를 연구하는 죄론, 구원을 연구하는 구원론, 마지막 일을 다루는 종말론이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균형 잡힌 존재로서의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신실하신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성경은 그분을 공의롭고 의로우신 분으로 계시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의로우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죄를 용납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태도에서 한 번도 변하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일방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분이 공의롭고 거룩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회개하는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 율법의 최대 한도까지 처벌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입니다.
로마서 6:23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구약성경에서 모든 범죄는 공의로운 보상을 받았다고 읽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에게 나타나는 감정은 타락한 작은 위조품이거나 완전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본래의 본성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물론 무신론자들은 신이 인간보다 낫기 때문에 인간이 미워한다면 신은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않을 것이고 신은 누구도 미워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원수를 용서할 수 있고 하나님도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왜곡된 견해입니다.
인간의 모든 속성은 주님 안에서 천 배로 확대됩니다.
신이 균형 잡힌 존재가 되려면 신은 균형 잡힌 본성을 가져야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분의 질투는 완벽해야합니다.
그의 사랑은 완벽해야합니다.
그분의 의는 완벽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진노도 완벽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이 단순한 인간이었다면 그는 완전히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거룩함은 완벽합니다.
그분의 의는 완벽합니다.
그분의 공의는 완벽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죄를 전혀 용서하지 않으시거나 죄인의 죄를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기꺼이 지불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십자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대속죄를 제외하고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문제는 인간을 하나님에 비유하고 인간의 형상을 따라 신을 만들거나 인간의 공상적인 상상력을 따라 신을 만들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감정과 감정, 질투, 분노, 의로움, 정의.
사람의 웃음, 눈물, 거룩함, 선함, 친절, 자비는 타락한 것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한때 위대하고 거룩했던 창조주 하나님의 성품의 최소한의 잔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셨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영이시며 균형 잡힌 존재이며 그의 모든 속성은 완벽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단순한 인간이었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처럼 그를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닙니다.
신이 단순한 인간이라면 양면성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욕망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민수기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려고 사람이 아니시며 회개하려고 인자가 아니십니다. (민수기 23:19)
신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함께 작용합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위한 균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옥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랑의 신이 무력한 인간을 영원히 그곳에 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신에 대한 불균형적인 견해입니다.
당신이 믿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지옥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리고 지옥의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믿지 않거나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계속 거부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우라누스의 뒷면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당신은 셋째 하늘과 유리 바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무저갱에 사는 지구의 주민들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발밑으로 직선거리로 약 6000킬로미터에 달합니다.
그래서 뭐?
저는 구원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기 전에 지옥을 미리 맛보고 심지어 지옥이 당신의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할 정도로 지옥을 맛본다는 사실을 봅니다.
지옥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예수 그리스도 께서 지옥이 사실이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에 우스꽝 스럽습니다.
사실, 산상 수훈에서.
"지옥 불"이라는 표현을 처음 만드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지옥 불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산상수훈에 속아 넘어갈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에서 사람들이 지옥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측정하는 가장 거친 상황이 발생합니다.
둘 다 같은 메시지 안에 있습니다.
지옥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균형적인 관점입니다.
지옥의 공포와 갈보리의 정전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엄격함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여러분 중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읽을 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그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죄의 화신이 되게 하신 데에는 무엇이 관여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옥의 교리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거부할 때, 우리는 주님이 아니라 불균형한 존재입니다.
이 말씀에 무엇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리스도께서도 한때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의인은 불의한 자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3:18)
그걸 사랑이라고 하나요?
이 진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시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13)
하나님이 당신을 저주로 바꾸신 것이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지옥의 공포와 영원한 형벌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드러내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텅 빈 수동적 중립 세력인 TM에서 자신을 드러낸 신과는 다릅니다.
그는 미국의 주요 주립 대학의 졸업생과 교수진이 제시 한 하나님과는 다릅니다.
위대한 중력장 또는 영원한 진화의 에너지 장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을 거룩하고 죄에 대해 엄격한 태도로 계시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선호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우리에게 거룩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유죄인 죄인에게 영원한 저주를 선고합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기적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만족시키는 구원의 길을 발견하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서 이에 대해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공의로우시면서 동시에 죄인을 의롭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공의롭고 거룩하시면서 죄인을 의롭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인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이 해결책은 율법을 만족시키고 인간을 구원과 저주를 선택하고 천국과 지옥을 선택할 수있는 자유 의지를 가진 피조물로 남겨 둡니다.
좋아요, 우선 하나님은 거룩합니다.
완전한 거룩함 외에는 다른 것이 될 수있는 신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거룩함이 아니라면 그는 신이 아닙니다.
물론 거룩하다는 것은 모든 더럽힘으로부터 자유롭고 순수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순수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요한일서 1:5)
하박국 1:13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악을 보는 것보다 더 순수한 눈을 가지고 있으며 죄악을 볼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1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주여, 신들 중에 주님과 같은 이가 누구입니까? 주님과 같이 거룩하심으로 영광스러운 이가 누구입니까?
사무엘상 2:2에서
주님 외에 거룩한 이가 없나니 주님 외에는 아무도 없느니라.
이사야 6:3.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외쳐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사이먼 피터가 말합니다.
기록되었으되 너희는 거룩하라 내가 거룩하니라 하였느니라. (베드로전서 1:16)
이제 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그를 인간과 분리시킵니다.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을 거부합니다.
주립학교 교수진의 표준 운영 절차는 창세기 10장부터는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창세기 10장부터는 신화를 다루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물론 창세기 10장부터는 기록된 역사이고 죽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돌과 바위가 시험해 보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죠.
역사에는 홍수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다.
역사에 바빌로니아 도시 에르와 레이크시, 아카드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와 바빌로니아의 지구랏 근처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증거도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을 거부하는 성경을 다루는 표준 방식입니다.
창세기 10장부터 그의 역사에서 창세기 10장까지의 모든 것이 신화와 전설인 척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처음 세 장은 당신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세 장은 다윈이 원숭이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원숭이였다고 가르칩니다.
처음 세 장은 당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당신은 짐승의 수준으로 내려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정주의라고 부릅니다.
진실을 다룰 때 1온스의 부정주의는 1파운드의 긍정주의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결국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편협하고 편협한 편협한 위선자들은 열린 마음으로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방송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협박과 위협으로 라디오 방송국을 폐쇄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양육 방식에 반하는 성경 진리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타락한 인간과 하나님을 구분합니다.
인간은 타락한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죄인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때때로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에베소서 2:13)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7:11)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는 죄 사함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이교도는 없습니다.
그 기본적인 보편적 진리를 배우려면 학교에 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분의 거룩한 진노로 죄를 벌하십니다.
이것이 이사야 53장 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채찍에 맞으시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좋아요, 하나님은 거룩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불교의 신이나 힌두교의 신이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을 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이 너무 높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을 대체하기 위해 자신의 기준을 세우려는 아담의 본성을 따르는 사람들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여러분을 대신해 죽으신 죄 없는 구세주를 제외하고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혼자서 이런 식으로, 인간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좋아요, 두 번째로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을 읽어보세요.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동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사는 사랑입니다.
회심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 계신다면, 그 사람은 사랑으로 내주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이니라. (요한일서 4:7)
이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잡지 랙에서 사랑은 음행, 섹스, 변태, 야수성 및 간음입니다.
또는 간음에 대한 성인 동의.
신문 가판대에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누군가의 연애와 누군가의 로맨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보통 음행과 간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가장 솔직하고 솔직하고 개방적인 시대라고 공언합니다.
이 시대는 가장 기만적인 가상의 위선적인 베니어판 시대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감정적 인 감각 .
사람들은 음행이나 간통 또는 합법적인 결혼 상황이나 관계를 의미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의 복지에 대한 열망과 기쁨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인과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너희에게 무슨 상이 있느냐 세리도 그렇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5:46)
나와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만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공통된 합의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의 복지를 갈망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시나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나는 당신이 그를 국경이나 독재자로 참아 냈는지 또는 집주인으로서 집세를 약하게 지불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 대화하고 싶을 겁니다.
신을 사랑하나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적에 맞서 편을 들어줍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 악하게 생각하는 것을 주저하고 항상 최선을 다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특히 신자들을 향해 나타납니다.
성경은 요한복음 3장 36절에서 불신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성경은 자신의 종교와 성례에 의지하여 자신을 구원하는 종교인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죄에 빠져 죽고 죄에 빠진 채 세상에 홀로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소망 없이 세상에 홀로 있습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입니다. ?????? 인용 ???????
이제 인류에 대한 부정적인 그림은 어떻습니까?
성경이 대학 커리큘럼에서 허용되지 않는 이유를 알기 전에 성경을 멀리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죽은 역사와 시적 아름다움만 빼고요.
사람들이 성경의 위대한 교리와 진리를 공부하고 믿지 않는 이유를 알기 위해 성경을 멀리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 불교,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 라마크리슈나, 하버구루를 선호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성경을 많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배를 흔들지 않는 사람.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적이 없다면 종교를 떠나서 성례전과 나머지 말도 안되는 것들.
당신은 허물과 죄로 죽었으니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한테 화내지 말고 하나님께 화를 내세요.
하늘에 계신 주님께 말씀드려서 이렇게 말하세요.
나는 당신의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의 책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장의사가 삽으로 당신을 침대에 눕히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요한복음 16장 2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니, 이는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6)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노와 저주에서 벗어날 기회를 주기 위한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를 위해 그가 받아들이는 모든 아들을 징계하고 채찍질하십니다. (히브리서 12:6)
성경에서 사랑은 베푸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고 베푸는 것은 매우 가능합니다.
그러나 베풀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랑에는 한쪽 또는 양쪽 모두의 이기심이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얻으려고하지 않는 사랑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간단히 이것을 의미합니다.
즉, 개인의 구세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놓친다면 이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을 놓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실 만큼 당신을 사랑하셨고, 당신에게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해 줄 다른 친구가 없습니다.
좋아요, 마침내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여러분을 교제로 부르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9)
신명기 7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라.
여기서 신실하다는 말은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하시고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신실하십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은 구름에까지 미치나이다. (시편 36:5)
그의 모든 일은 진실로 이루어집니다. (시편 33:4)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약속을 지키시고 말씀하신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데서 나타납니다.
발람이 숫자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며, 인자가 회개해야한다고 말했는데 행하지 않거나 말했는데 선하게 만들지 않아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네,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려움에 처한 자녀를 보호하고 인도하겠다는 모든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가장 위대한 약속 중 일부는 신자에게 제시됩니다.
시몬 베드로는 그 약속들을 지극히 위대하고 귀한 약속이라고 불렀습니다.
목록에서 볼 수있는 몇 가지만 인용하겠습니다.
거듭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아무리 종교성이 높더라도 접근 할 수없는 부를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첫 번째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서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립보서 4:19)
두 번째.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세 번째.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믿는다. (빌립보서 1:6)
네 번째.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조력자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하든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히브리서 13:6)
다섯 번째.
하나님은 모든 은혜가 너희에게 넘치도록 하시나니 이는 너희가 모든 일에 항상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도록 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8)
여섯 번째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아무 것도 우리를 끊을 수 없으리라.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는 주춧돌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우리가 믿지 아니하면 그는 신실하사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시느니라. (디모데후서 2:13)
그리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그래서 하나님은 균형 잡힌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다음 웹 신학 세미나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성경 구절과 관련하여 결론을 도출할 것입니다.
오늘 공과를 통해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고, 주님을 조금 더 잘 이해하고 그분의 말씀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책에서 자신에 대해 제시하신 것과 같은 균형 잡힌 하나님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좋은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